연대와 헤게모니(13)
연대와 헤게모니(13)
  • 이홍길 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8.26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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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가 밥 먹여 주나하는 말과 밥만 먹고는 못산다는 말을 동시에 주절거리며 살아온 우리들의 일상이다. 허지만 민주가 없으면 억압과 능욕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쉽게 간과한다.

그것을 상실하고 큰 권력들의 횡포가 무소불위로 난무하고 난 연후에야 실감하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 지경이 되면 사람들은 이미 권력의 그물에 돌돌 말려 비참해져 버린다. 유신시절의 어처구니없는 긴급조치도 7년이나 계속되었고 김재규의 의거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떤 몰골들로 허우적거리고 살고 있을까를 상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이러한 끔찍한 상상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상기하면서, 그래도 우리들의 유신 7년이 중국의 문혁 10년보다는 덜 지독했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1966년부터 1976년에 이르는 10년의 문화대혁명은 중국 현대사의 대재난으로, 온 중국을 연출된 혁명의 광란 속에 몰아넣어 인민들의 생존을 마음껏 유린한 시기였다.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친위혁명으로 최고 영도자 모택동과 혁명 학생들인 홍위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일으킨 대동란이었다.

모택동은 국제적 고립과 국내적 경제실패를 대처하는 가운데, 실권파에게 그의 권력이 밀리는 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만정서를 꼬드겨 혁명 열정으로 분출시키면서 그 운동의 방향을 실권파 타도로 유도하였다. 항일전쟁 반장전쟁 정풍운동 신중국 건설로 확보된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는 권력투쟁의 검은 음모를 은폐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심리적 자원이 될 수 있었다.

혁명의 광풍 속에 그 동안의 붉은 혁명의 성과와 그 이상적 미래가 이미 타도된 줄로 알았던 자산계급의 복벽에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감과 반혁명세력의 중심에 공산당 실권파가 도사리고 있다는 모택동과 문혁파의 호소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혁명의 나사못”으로 자부하면서 가미가제식의 정신을 가능케 하였다.

신중국은 혁명의 결과였고 혁명정당인 중국공산당이 그 전위였고 모택동은 동방홍으로 추앙받는 불세출의 영도자였다. 모택동은 현대중국의 어떤 지도자도 비견될 수 없는 혁명의 권화였다. 혁명은 분투목표와 공동의 이상을 갖고 있고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가 가장 중요한 활동이 된다.

혁명에 있어서는 전체의 이익이 무엇보다 우선하고 절대복종이 혁명역량들의 필요한 소질이 되고 폭력이 정당화되면서 온건함과 타협은 마땅히 적대시되어야 했다. 50년대에 이미 “교육은 무산계급의 정치복무를 위한 것”으로 공식화되고 학교에서는 보도원제도를 두어 학생들의 사상을 지도감독하고 매학기 학생들의 정치표현을 평가하였다.

학생들은 일반 학습 외에 일정한 혁명표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써야했고, 일차 적극분자가 되고 나아가서는 공청단원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정치신분을 획득하기 위해서 학생들은 서로 경쟁해야 했고 당과 상급조직의 승인을 쟁취해야 했다.

대부분의 학생은 군중조직에 참가해야 했고 문혁전에도 조직 속의 사람이 조직 밖의 사람보다 우월했다. 그러므로 혁명파나 좌파의 칭호를 획득하기 위해 분투노력해야 했다. 그들은 모든 경우에 좌파나 혁명파의 칭호를 주는 사람을 만족시켜야 했는데, 칭호 수여자는 최고 영수 모택동이 되기도 하고 군구 사령관일수도 있었다.

민심이 천심일 수도 있고 젊음은 국가의 원기일 수도 있으나 그 운동의 방향은 일정한 조건 속에 이루어지는데, 모택동의 책략에 우롱당하는 한 건전할 수 없고 혼란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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