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헤게모니(11)
연대와 헤게모니(11)
  • 이홍길 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8.12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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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지 꽃이 다 피게하고 모든 사람들이 소리 내어 다툰다는 말을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 하는데 이는 휘황한 언론자유의 정경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이것이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공산국가 중국에서, 오늘도 아닌 1956년의 모택동치하의 중국에서 공포된 정책인 것을 알면 중국 영도자의 마음씀에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역시 모택동은 큰 지도자였구나 하면서 한때 세계 청년학생들의 우상이었던 그에 대한 존경심을 상기할지도 모른다. 신중국의 혁명적 정세에 압도당해 있는 지식분자와 민주인사들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허심탄회하게 마음껏 체제를 비판하라고 최고 권력자가 격려할 때 참고 참았던 수많은 말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을 것을 예상할 수 있겠다. 그런데 끔찍한 것은 영도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말들까지 거침없이 나오자 “반동의 몰골을 드러내게 한다.”거나 “뱀을 굴 밖으로 유인해 낸다.”는 등의 악랄한 사냥꾼의 심보로 최고영도자와 국가기구가 호시탐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1957년 58년의 반우파투쟁이었는데, 우파로 지목되면 노동개조 등의 징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격리를 면치 못하였다.. 세계적 인류학자인 비효통은 쌍백방침을 환영하여 두 번째 해방이라 말하고 “백가쟁명은 자유토론을 통하여 시비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 바로 지식분자로 하여금 무엇이 유물주의이고 무엇이 유심주의이며 유심주의는 왜 나쁜가를 알게 한다.”고 하여 당과 정부를 옹호하는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당국자는 봄꿩 울음소리를 좇아 그들의 예상 적대자들을 적발해가고 있었다.

지식분자들의 선의의 낙관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관문이 되었다. 신민주주의론과 연합정부론을 제시하여 민주정파와 지식분자들의 협력과 호응을 얻어 신중국을 건설한 모택동의 정치적 행보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모택동을 임기응변에 탁월한 전술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모택동의 저간의 거동을 이해할 수 있겠다.

1956년 쏘공 20차대회가 열려 후루시쵸프는 「개인숭배 및 그 후과에 대하여」라는 비밀보고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로 인한 숱한 오류와 죄악을 폭로하였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모택동에 있어서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은 스탈린을 배워왔고 개인숭배는 이미 40년대부터 모택동사상을 강령으로 채택하여 정풍운동으로 강화 해 온 터였다.

스탈린 격하운동에 영향을 받아 폴란드사건과 헝가리사건이 일어나 중국 공산당도 경천동지의 변화에 새롭게 대응해야만 했다. 이런 배경 하에 중공의 8차 대회가 열렸고 당 강령에서 모택동사상을 삭제하면서도 아울러 정풍운동을 예고하였다. 1957년 3월에는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를 논하여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찾았으나 모택동은 적대모순과 비적대모순을 들어냈다고 칭송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대항은 소멸했지만 모순은 존재한다.

비평에도 두 가지가 있어 적들은 우리를 비평하고 공산당에 불만하며 인민도 우리를 비평하고 공산당을 비평할 수 있지만 이는 반드시 적대 비적대로 분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민의 내부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기 위한 정확한 정보를 장악하기 위해 쌍백방침을 제출하였는데, 지식분자와 민주당파의 반응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이미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한 자본주의 도전으로 적대모순을 들어낸 것이었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평생 싸우고 평생 승리한 전술가 모택동의 거친 대응이 무자비한 반우파투쟁으로 역사상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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