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말 사잇길-'하래' '한나잘'…'공구리' '뺑끼'
전라도 말 사잇길-'하래' '한나잘'…'공구리' '뺑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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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미로 (2)

포크레인 한 대가 길바닥을 쪼개고 있다. 두두두두 길을 쪼아대는 포크레인은, 크고 잔인한 육식성 동물 같다. 뼈인 듯 희게 드러난 돌멩이들.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저 짐승이 지구의 살덩이를 물어뜯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 코크링이다. 코크링.'
아이는 포크레인을 코크링이라고 발음한다. 문득 아이의 '코크링'이라는 발음이 녀석의 할아버지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환기되었다. 얼마 전 시골에 갔을 때,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메모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산떡 집 뒤지분데 한나잘
유산떡 꼬치밭 하래
포크링 방죽꼴 방천 일 한나잘


전라도 말을 제법 알고 있는 나지만, 아버지의 메모를 그대로 읽었다가는 큰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집'을 뒤집다니! 그렇게 힘 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의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내산댁 짚 뒤집은 데 한나절
유산댁 고추밭 하루
포크레인 방죽골 사태 일 한나절


더 풀어 쓰면, 내산댁은 짚 뒤집는 일을 한나절 하였고, 유산댁은 고추밭 일을 하루 하였고, 포크레인은 논둑 일을 한나절 하였다는 뜻이다. 전라도에서는 사태 난 것을 '방천 났다'고 한다. 아마 방천(防川) 할 일이 생겼다, 는 말에서 유래된 듯하다.

방천은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제방을 쌓는 것을 뜻하는데, 둑이 무너진 것을 방천 났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의 변화라는 것은 몇 사람이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시대 따라 말의 표기도 변한다

아이는 걸음을 옮기지 않고 한참동안 포크레인을 바라본다. 입에서는 무슨 주문처럼, '코크링, 코크링, 아빠 코크링.'이라는 말이 새나온다.
나는 몇 번이고 포크레인이라고 발음을 교정해 주지만, 아이는 내 발음을 따라하지 못한다.

시대가 변하고 서양말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그 말의 표기 원칙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른바 로마자 표기 원칙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쓰는 말이 그 원칙과 달라서 혼란을 주기도 한다. 맞춤법과 무관하게 소통되는 말들이 있는 것이다.

흔히 쓰는 말로 샷시 라는 것이 있다. 아파트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샷시 하는 것이다. 베란다에 창문을 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데, 국어사전 어디에도 샷시라는 단어는 없다. 새시가 있을 뿐이다.

비슷한 예로 스치로폴이 있다. 이 말도 사전에는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스티로폼을 스치로폴이라고 부른다. 사전에 있는 스티로폼은 이미 죽어있는 말이고, 살아 움직이는 말은 스치로폴이다. 특히 건설 현장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데, 니빠, 뼁끼, 공구리 등이 그것이다.


일본식 외래어와 말의 생사

그래서 대학을 나와 건설현장에 처음 나온 기사들이 가장 애를 먹는 것이 용어의 문제이다. 펜을 든 자들이 쓰는 용어와 공구를 든 자들이 쓰는 용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신출내기 기사들은 땀이 밴 말들을 익히는데 적잖은 시간을 보낸다. 어떤 기사들은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선다.

공구리가 아니라, 콘크리트라고 하셔야죠. 하는 식이다. 그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 있다. 그래요? 왜요? 일본식 발음이어서요? 그래서 미국식으로 발음해야 옳다고요?

물론 남발하는 외래어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식 발음을 미국식으로 교체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말에 대한 예의는 그 말이 지금 통용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무분별한 외래어 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민중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말도 좋은 단어는 과감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고, 사투리라는 말의 바다에서 살아 숨쉬는 어휘를 찾을 수도 있다.

말의 생사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때로는 인위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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