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역리와 철학자 ‘러셀’
자살의 역리와 철학자 ‘러셀’
  • 노영필 철학박사
  • 승인 2011.07.0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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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필/ 전남고,철학박사
“네 살 때 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인생이 너무 따분하고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 따분한 인생을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요즘 아이들의 ‘자살’ 고민과 일치할까? 98세까지 살았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1872~1970)이 자서전에 쓴 글의 일부이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러셀에게 있어서 너무 이른 나이에 ‘자살’이라는 고민을 거쳤기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러셀의 삶을 들여다보면 지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따분하리라 느꼈던 네 살적 ‘고민’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옥스퍼드대학 교수,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을 이끈 인권운동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그의 이력서이다. 그의 인생을 뜨겁게 이끈 열정과 그가 평생을 바쳐 추구하고자 한 가치를 채우게 했던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러셀은 그의 「자서전」에서 세 가지 열정이 그의 인생을 지배했다고 고백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연민’이 그것이었다. 러셀은 이 열정들을 거센 바람처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때로는 깊은 고뇌의 바다로, 때로는 절망적인 생각의 벼랑으로 휘몰아 자신을 단련시켜갔던 것이다.

러셀의 ‘네 살적 자살이야기’를 읽으면서 요즘 청소년들의 ‘자살’ 신드롬(?)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없을까? 러셀이 정리한 열정과 전혀 다르게 포위된 우리 아이들에게 자살의 그림자가 찾아오는 이유는 뭘까?

아이들은 외롭고 우울하고 혼돈스러운 현실의 벽 앞에서 사색의 힘으로 씨름해 보기도 전에 너무 짧은 순간 죽음에의 문제로 비약해버리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버린 죽음. 세상의 뉴스로 전해지는 ‘자살’은 너무 쉬운 선택처럼 보인다.

어찌 우리 아이들은 이런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일까.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채 연속적인 죽음의 행렬로 이어지는가. 생명의 존귀함을 더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못하는 현실이라 생각하니 더욱 슬프다. 아니, 삶의 가치를 고심해 보지 못한 채 이슬로 사라지는 아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꿈에 부풀어 생기발랄 힘차게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딸아이가 요즘 들어 부쩍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나서고 생기가 한풀 꺾인 지친 모습으로 집에 와서는 예전엔 별일 아닌 일에도 까르르 웃곤 하더니 눈치를 보며 아무리 웃겨보려고 해도 말 걸기가 조심스러울 만큼 가라앉아 있다. 그러더니 아이와 함께 등교하던 몇일 전엔 “아빠, 나 학교가기 싫어.”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였다. 화들짝 놀라서. “왜? 그러니?”하며 아이의 표정을 살피니 “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아. 마구 쏟아붓는 공부량을 기계처럼 소화하며 떠밀리듯 공부해야 하는 게 싫어” “......” 더럭 겁이 났다. 이게 내게 찾아온 불행을 예고하는 그림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행히 나를 송두리째 잡아 흔드는 고민과는 다른 푸념이었지만 아이들이 스스로의 문제에 부딪쳐 해결해보려는 노력조차 해볼 수 없게 얽어놓은 숨막히는 생활 속으로 아이들을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삼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러셀이 주는 교훈이 새롭다. 우리 시대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냉정한 자기 성찰과 열정을 쏟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 아닐까. 아이들의 ‘감금’된 현실로부터 사고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자기의식을 열고 사회로 확장되는 관계망 속에서 자신을 놓을 수 있도록. 러셀의 말처럼 지금하고 있는 아이들의 고민이 스스로의 문제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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