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문화와 소통
아시아의 문화와 소통
  • 조용철/호남대 신방과 명예교수,전 동아일보 미디어
  • 승인 2011.05.03 1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시아 공동체론(共同體論)
이번학기 호남대학교에 개설된 “아시아 공동체론(共同體論)” 강의 일부를 매주 “시민의 소리”에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3곳이 아시아다. 아시아는 일찍이 인류문명을 앞서 이끈 엔진역할을 하였다. 아시아란 말은 Asu(그리스의 동쪽 해가 뜨는 곳)에서 비롯되었는데 서양(해가 지는 곳)을 의미하는 Ereb의 문화와는 차이가 많다.
동양인은 세상을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공간으로 생각하는데 서양인은 세상을 각각의 개체가 모여 집합을 이룬 공간으로 본다. 동양인들이 직관적이라면 서양인들은 분석적이다. 동양인이 내면적인 소통을 중시하는데 반해 서양인의 소통은 표현적이다. 동양인들은 남과 비슷해(동등)지려고 한다면 서양인들은 남과 다르려고(차이) 애를 쓴다. 이 같은 문화적인 차이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수천 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야스퍼스는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는 책에서 축의 시대(Axial Age)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이 시대의 현자들은 당대 이전의 신화적 인식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엄청난 고민을 했다고 적었다.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를 기원 전 900년부터 기원 전 200년까지로 설정, 이 시기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유의 천재들과 생각(사상)들이 나타났는데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고타마 싯달타가 있었고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아, 예레미아, 이사야가, 그리스에서는 소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이 있었다고 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인간의 비애에 대해서도 함께 슬퍼하는 공감과 자비의 정신을 발견했다. 이들이 찾은 답은 지금까지도 인류의 철학적, 종교적 성찰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데 그 연원은 바로 오만과 전쟁에 따른 살생 그리고 기아와 약탈에 의한 침탈과 폭압이었다. 그리스의 히브리스(hybris, 오만), 케노시스(kenosis, 자기 버리기), 인도의 아힘사(ahimsa, 불살생), 두카(dukkha, 고통), 이스라엘의 바빌로니아 유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등 각각의 기표(記表)엔 그 시대와 지역 특유의 문화적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지만 보편적 기의(記意)는 자비, 사랑, 상생이었다.

동양은 지금 끓는 냄비 속 같다. 중동발 혁명이 그렇고 오만한 중화주의와 ‘매뉴얼의 역설’에 함몰된 일본이 그렇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좌우이념, 양극화, 빈부, 지역 간 갈등이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비등점을 낮추려면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소통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언론이 지성과 영성의 소통 역할을 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왜곡된 정보와 부도덕으로 얼버무려진 잘못된 ‘정보와 도덕의 합선작용’에 머무른다면 ‘축의 시대’ 현자들의 유전자는 어디서 되찾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의 선인들은 옛날 옛적에 이미 온 인류에 대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상생이라는 지혜(보편적 가치)를 발견, 후손에게 흩뿌렸다. 아시아인 모두는 조상들이 뿌린 그 씨앗을 더 튼실하고 영양가 있게 키워 나아갈 의무가 있다. 우리의 경우, 안으로는 조용필의 소록도 공연이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고 밖으로는 한류가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진정한 소통만이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절감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 현자들은 일찍이 인류문명을 앞서 이끈 엔진 역할을 했다. 그 후손들인 우리가 그 엔진을 더 강력하게 가동해야만 한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