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를 찾아서(4)
연대를 찾아서(4)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5.0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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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해방 공간과 1950년대를 정치가로 산 조봉암에게 한국의 정치현실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공산주의자의 과거를 청산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건립에 협조하여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나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의 핵심세력은 될 수 없었다. 그는 전향자였고 민주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반독재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보수 정치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고 무엄하게도 이승만을 상대로 대권 도전도 불사하는 동키호테(?)같은 존재였다. 전향한 그에게 있어서 그의 소원은 “자유와 독립 그것이며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무엇이던지 힘껏 마음껏 해보고 싶은 그것뿐”이어서 필연적으로 그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런데 당시의 정치현실은 초보적인 자유도 보장되지 않아 집권세력과 집권자와 다른 언동은 반정부적인 것이 되어 갖가지 형태의 탄압을 받았다. 일부 인사들은 아직도 그에게 “공산당과 무슨 혈맥이나 통하는 것 같이 점잖은 말로 모략을 유포”하고 있었고 “무엇인가 누를 뒤집어씌우고 죄를 얽어 붙여서 어느 구렁에다가 몰아 넣으려고 노력하는 경향”도 있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국민들이 완전히 국민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심지어는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어디 가서 호소 한마디 못하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중간파․협상파들을 사갈시하는 집권세력들은 보도연맹원들을 전쟁의 와중에 대량 학살하였고 심지어는 자유당의 분해과정에서 이범석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족청계라 하여 탄압하였는데, 조봉암의 판단으로는 해괴하고 불가사의한 짓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공산당과 투쟁한다는 것은 어는 한 개인이나 어느 한 당파의 영예를 위한 대결이 아니었다. 실로 삼천만 민족의 생존과 자주권을 위한 만족투쟁이자 독립투쟁이었다. 낙관도 비관도 불허하는 국제정치적 조건에서 민주 민족의 대동단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민주국가에 있어서 국민은 모든 사태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갖을수 있고 상호 견제하는 비판의 자유가 있다. 집권자와 집권세력은 이 모든 불평과 비판을 받아들여 정리하고 소화시키며 그것을 합리적으로 통솔․귀납시키는 것이 그와 그들에게 부여된 정치적 권한인 동시에 의무라고 죽산은 지적하였다.

죽산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세력의 신장이고 연합이었다. 농촌재건을 위시한 부흥재건에 있어서 당면한 경제국책도, 아울러 남북통일 과업에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종합적 승리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민주세력의 신장에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성정당들의 협력방안, 실세 영도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선도안, 자유당 이외의 모든 정당이 야당연합을 이루어 여당과 공고히 협력하여 민주 진영의 최고 집결체의 구성에 도달하는 방법, 민주세력의 자발적 신장을 촉진하기 위하여 정당분야의 재편 및 신조직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며 조직 간의 의견 차이는 고위급에서 조정하면 되었다.

당시 그가 제시하는 연합은 반공 민주 민족연합으로 기본권 보장이 그 전제가 되었다. “비판력의 강화는 생활력의 앙양인 동시에 국민의 자각을 가장 급속히 촉진하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이승만 독재는 이를 수용하지 못했고, 죽산을 사법살인한 2년 후 4․19 혁명으로 정권은 붕괴되고 독재자는 망명지에서 그 최후를 맞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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