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를 찾아서(3)
연대를 찾아서(3)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4.2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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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죽산 조봉암을 소개하는 글은 많지 않다. 근년인 2009년에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책이 조봉암의 몇 개의 정치적 주장을 모아 출판되었다. 그 책이 소개하는 조봉암은 독립운동가․정치가로 1948년에 초대 농림부 장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같은 해 민주사회주의의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으로서 정당 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2010년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되어 사법살인으로 억울하게 사형 당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의 헌정사에는 대통령의 자살만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가 사형 당하는 비극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새삼 죽산 조봉암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를 추모하기 위함도 아니고 사법살인 당한 그의 억울함을 만천하에 하소하기 위함도 아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연대 움직임을 살피는 가운데 죽산 조봉암이 한국전쟁이 갓 끝난 1954년에 민족 민주세력의 대 연대 대연합을 주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혜안을 소개하고자 함에 있다. 민주 기초를 다지고 반공통일역량을 규합하기 위한 그의 연대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를 간첩으로 몰아 죽인 당시 당국의 악랄 졸렬함은 규탄 받아 마땅하고 그 정치 배후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연대론을 소개하기 전에 그의 인품의 일단을 엿보고자 한다. 3․1운동에 참여하여 일 년간의 감옥생활을 격은 후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고, 1922년 러시아의 베르흐네우딘스크 국제공산당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데, 이후 30여년의 세월을 공산당 운동에 몸담고 있었다.

 

훗날 죽산은 그의 공산당 활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더 강력한 운동이라고 믿어져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많은 사회주의 좌익 독립 운동가들과 그 괘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죽산에 의하면 “해방 후에 표면화한 조선 공산당이라 하는 것은 이 민족의 독립과 국제적 평화를 위해서라기보다 소련의 이익과 정책을 위해서는 독립은 안해도 좋다는 기본강령 아래 움직였다. 노동자나 농민이나 그 외의 모든 사람이 잘살게 된다는 것은 오직 공산당이 독재정권을 잡는다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농민이 굶어 죽어도 좋다고 하는 정책의 본색이 확실히 드러났다.” 공산당의 이런 태도는 죽산으로 하여금 공산당과 좌익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조건이 되었다. 그는 박헌영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남로당을 비판하여 출당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동상으로 7개의 손가락을 잃기도 하였다. 1939년 만기 출소되었으나 그의 지하투쟁은 계속되었다. 1945년 다시 검거되었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석방된 불굴의 투사였다.
반공이 필수 정치자본이 되고 멸공이 최대 정치자본이 된 전후 50년대, 죽산의 공산당 경력은 독립운동으로 추앙된 것이 아니라 족쇄가 되어 그의 정치활동의 걸림돌이 되다가 마침내 그는 이승만 도당들의 정치음모에 걸려 순국케 되는데 민주세력의 주류로 자처한 한민당 전력의 민국당은 그저 방관하고 있었다.
오호 통재라! 한국 현대정치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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