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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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승현 /생명나무교회 목사
  • 승인 2011.04.0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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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현 /생명나무교회 목사
지진과 쓰나미가 초래한 재해에도 놀라우리만큼 침착함을 보여주던 일본인들이 확산되는 방사능 공포에 침착함을 잃고 있다. 지필 수는 있으나 끌 수는 없는 원자력이라는 불 앞에 세계최고의 안정성을 자랑하던 일본 원자력발전소의 신화가 붕괴되고 있고 과학주의의 신화 역시 침몰하고 있다.

흔히 어떤 일에 정성을 쏟았으나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을 때 하늘도 무심(無心)하다는 표현을 하곤 한다. 냉철하게 세상사를 보면 하늘도 무심한 게 아니라 하늘은 무심하다. 노자도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고, 예수도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려서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마태복음 5장). 신체라는 자연을 내재하고 살아가는 인간 역시 생로병사라는 자연법칙을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시간의 차이와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모든 죽음은 자연사(自然死)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자연의 감옥을 탈출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포함하고 있지만 초월했다. 45억년 지구역사의 마지막에서 한 존재가 가이아의 감옥을 탈출했다. 그 이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500만 년 전 광물, 식물, 동물을 넘어선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생각하는 갈대(자연)의 역사와 문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거대한 쓰나미 앞에 비명에 간 이마타현의 사람들은 쓰나미보다 훨씬 위대하다. 쓰나미가 일본국민이 우상숭배를 한 것에 대한 벌이라는 모씨의 말은 유아적 종교에 갇혀 있는 주류 개신교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쓰나미는 그저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적인 춤일 뿐이다. 쓰나미는 의지와 도덕에 따라 대상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위력 앞에서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은 다르다. 물에 잠기면 5분 안에 익사하는 나약한 갈대지만 초자연적인 마음을 통해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선악과 의미를 물을 줄 아는 ‘나’라는 의식을 지진 생각하는 갈대였다.

문제는 천재지변이 아니다. 천재지변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생각하는 갈대가 자신의 힘으로 갈대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자만할 때 악마가 된다. 생각하는 갈대가 무분별한 욕망의 노예가 될 때 악마로 변신한다. 지금도 후쿠시만 원자로에서 퍼져나가고 있는 방사능은 애초에 안전한 원자력이라는 말은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실재가 없는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입증한다. 합리적인 생각은, 더 나아가 초합리적인 지혜는 끌 수 없는 불은 지피지 않는다. 과학은 존중하나 그것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이윤을 추구하나 하나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윤추구에 목매단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 사고가 발생했을 때 원전을 폐쇄하는 초동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인명보다는 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저탄소녹색성장의 표본으로 원자력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있는 이 땅의 벌레 먹은 갈대들도 합심하여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의 안정성을 합창하고 있다. 원자력은 더 이상 녹색성장기술이 아니다. 정신착란이 만들어낸 잿빛자멸기술이다. 메멘토 모리. 네 죽음을 기억하라. 자연을 깔보지 마라. 제 살을 태우는 탐욕의 불꽃놀이를 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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