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경험(5)
연대의 경험(5)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3.21 16: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함께 살게 하고 함께 소통케 하는 것. 더욱이 막힌 것을 뚫는 소통일 뿐만 아니라 반세기도 훨씬 넘는 분단의 벽을 뚫는 소통이라면 그 아니 반가우랴! 본디 하나였던 공동체가 적대하기 수수십년. 백성의 뜻에서가 아니라 정권들의 의지에 의해서 조작에 의해서 지척이 만리였던 남북이 통일의 물꼬를 튼다하니 그 어찌 반갑지 않았을 것인가? 1972년에 발표된 7․4 남북 공동성명은 당국이 분단 이후 조국통일과 관련하여 내놓은 최초의 성명이기에 시정인들에게는 통일이 손에라도 잡힐 듯 뛸 듯이 반갑기도 하면서 날벼락에 잠깨듯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7․4 공동성명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하며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이상의 자주 ․ 평화 ․ 민족대단결의 통일의 3대 원칙과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하고 중상비방 금지 무장도발 금지 제반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실시, 직통전화 설치 등 중요사항 등을 합의 발표하였다. 통일을 위한 대망의 선결조건들이 그동안 남과 북에서 자국민들에게 독재의 벼락칼만 휘두른 당국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남몰래 통일을 위해 고심들 했구나 싶어 고맙기조차 하려던 찰나, 성명 발표 다음날인 1972년 7월 5일 국무총리 김종필이 정부 측 입장을 설명하면서 “국제연합은 외세가 아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북한과의 공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공법 ․ 국가보안법은 폐기하지 않는다.”라고 밝혀 박정권 내부에서 의견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행여나 하는 소망을 역시나로 짓밟은 것은 남한에서는 7․4공동성명을 발표한지 3개월 만에 통일을 구실삼아, 10월 유신을 통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긴급조치 9호까지를 연발하였다. 연발총이 난사되는 액션화면은 스릴이 있지만 연속으로 남발되는 긴급조치령은 민주공화국의 체통을 너절하게 만들고 말더니, 공화국의 수장인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충격적인 최후를 맞았다. 1973년 2월 18일자로 공표된 미국의 상원 외교위원회의 보고가 시사적이다. “박대통령은 이제야 그가 원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가 퇴진하려면 그 자신이 이에 동의하거나 죽거나 혹은 혁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극언하고 있었는데, 일말의 의혹은 유신이전에 박대통령은 그가 원한 권력을 갖지 못했다고 미국은 생각했을까 이다. 손발을 맞추기라도 하듯 북한도 남한에서 유신헌법이 선포된 후 2개월이 지난 1972년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해 더욱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리모델링했다. 과학적 사회주의로 그 역사적 유물론적 과학임을 과시하던 조선 노동당의 공산주의가 어떻게 해서 주체사상의, 하회탈이 아닌, 평양 탈로 바뀌게 됐는지 저간의 사정은 알 길이 없는 채, 권력 집중이 그 도를 넘다보니 질적 변환을 가져왔나보다 하고 상상해볼 뿐이다.
연대는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는 인민의 소망과 요구가 있어야 그 바람직한 격이 갖추어지지, 권력자들의 요구에 의한 연대는 권력자의 편의에 따라 하시라도 변용되고 파탄할 수 있음을 좋은 민초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