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경험들(3)
연대의 경험들(3)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3.0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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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 회장
한반도의 분단은 21세기에도 여전하고 그 분단 후유증은 아직도 치열하여 서해의 숨가쁜 긴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가슴은 처연하기만 하다.

분단 그것의 단초는 분명 일본을 패망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미국의 세계전략을 소련이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들은 분단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해방정국의 지도자들과 인민들이 분단을 발 벗고 나서서 반대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역사에서 특히 우리역사에서 『우리 모두 다 함께』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2차대전 이후 동구의 공산화와 그 영향의 확대는 세계 각지에서 미․소의 대립을 격화시켜 냉전을 고착화시키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 공위를 통하여 다국적 탁치정책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세계사적 주도권 경쟁에 들어간 두 강대국이 자국을 비호하는 우호적 정부수립에 경사되어 있는 현실에서 분단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민족적 양심에 따른 좌․우 지도자들의 대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한반도의 현실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고 있는 사회 정치적 투쟁으로 분단세력들에게 바람직한 활동조건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실패, 인민공화국의 실패는 우리의 자결보다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익이라는 입장에서 조성되었고 친일세력과 지주세력들이 빌붙으면서 이승만의 정치적 활로는 트르만 독트린을 통해 단선․단정으로 확보되기에 이르렀다.

1946년 미․소 공위 수석대표 슈티코프는 공위 개막연설에서
"소련은 조선이 소련에 대하여 우호하고 장래에 소련에 대한 공격의 기초가 되지 않는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바와 같이 진주 이후 우익세력이 강했던 지역은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조시키는 작업을 선행시킨 후 인민위원회가 행정권을 이양 받도록 했다.

이러한 것들은 소련이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확대 공고화시킨 의도적 조치로 미국과의 합의를 배제한 단독행동이었다. 1945년 말 총정치국장 슈킨의 보고서에는
북조선내 정권을 중앙 집권화 하여 이를 민주 활동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민주 활동가는 김일성․박헌영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의미하였다.

1946년 말 북한에서 언론자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비좌익 정치적 반대파들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통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정당은 있으나 결코 권력을 배분하지는 않았다.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귀국한 것 못지않게 소련이 북한을 점령했고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함으로써 소련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여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조직』을 보고하는 가운데
"우리가 임시인민 위원회를 조직하겠다고 발기하니 소련군정도 동의했다"고 말하고 있다.

남한에서 좌․우익 대립과 정치적 경쟁이 치열하여 폭동과 지도자 암살이 일어나는 가운데 미국과 이승만의 단정세력은 통일정부 수립을 포기하고 남한만의 정부를 탄생시키고 있는데 북한도 이미 5도 행정국을 거처 북한의 과도정권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성립시키고 이북 전역에서 전국사상총동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북 공히 분단으로 치닫고 있는데 분단을 저지코저한 세력이 없지는 않고 그들의 몸부림 또한 중첩했지만, 현실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겨우 민족정기를 들어내는데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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