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밑그림 (상)
연대의 밑그림 (상)
  • 이홍길
  • 승인 2011.01.24 16: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생존과 나의 가치는 이웃의 생존과 가치에 맞닿아 있고 나와 이웃들의 그것은 우리의 가치와 생존이 되는데 이것의 최대 공약수는 인간화이고 민주화인 점을 살펴보았다.
지난 세기말 우리들은 인간 소외를 글로도 많이 쓰고 말도 많이 하였지만 21세기 초입을 상당히 경과한 지금 인간소외가 줄어들기 보다는 오히려 심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인간소외를 외칠 기력마저 가셔가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진단이라 할 것이다.
덥다고 외쳐보았자 폭염의 기승이 꺾이지 않는 것처럼 사회의 거대화와 복잡화는 인간소외를 안타까워하는 지성들의 경고들을 비웃듯이 인간들 사이의 정신적 유대관계는 허물어져가 인간성 실종을 걱정케 하는 요즘이다. 아니 인간 · 인간성을 회의하게 하는 요즘이다.

인간소외 경고 비웃는 세태

구제역이다, 조류 인플루엔자다, 수십년만의 한파들이 자연의 재앙인가 인간이 만든 재앙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가축의 대량학살, 대량 생매장이 인간 삶의 주변에서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생명에의 외경이 무색하다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오늘이다.
“잘 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를 노래하면서 해내외를 가리지 않고 산업재해를 감수하면서 선진국의 문턱을 겨우 넘어 섰다지만, 그 결과는 녹록지 않고 상당수의 백성들에게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천만에 가까운 비정규직, 분별도 쉽지 않은 수많은 청장년 실업,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즐거운 나의 집을 노래 불렀던 노년 세대들은 거친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민주화의 사회 정치적 성취와 내 집을 갖는 가장의 성취를 그런대로 맛볼 수 있었지만 청장년 서민 세대들은 무슨 성취감으로 그들의 인생 노고를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지 안타깝고 궁금하다.
오늘의 현실을 투시하면 우리중의 일부는 부와 기회와 계략으로 도배한 특수층으로 돌출하고 나머지는 아수라장의 아귀들처럼 “쇠가 쇠를 먹는” 상쟁의 투쟁 속에 사람된 위신마저 내동댕이치는 내 볼일 봐 버리면 남이야 어쨌든, 사람된 도리야 어쨌든 모두가 그만이라는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 인간의 선 역량보다 악의 역량이 기세를 떨치면서 그 맹위를 더해가고 있다.
참담한 인간의 현주소는 인간의 본디가 어떠했을까를 의심케 한다. 인간은 동물도 아니고 신도 아니지만 동물에서 비롯되었지만 신을 경배하고 가치를 지향하는 존재로 감성과 이성의 존재, 상생의 존재로 알았는데, 상생을 넘어서 상해의 존재로 추락해 가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본성은 본디 악한 것이라고 말한 순자에게서 혜안을 느낀다. 먹어야 사는 인간, 그러다 보니 보다 좋은 것을 먹고 남보다 많이 먹고 차지해야 하는 동물. 맹수에 진배없을 뿐만 아니라 쉽게 많이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교활한 지혜와 기량을 세대를 넘어서 연마한 동물. 사람 모습이 너무 참담하고 으스스하다. 어디에서도 진선미를 추구하는 영성을 느낄 수 없다.

상실한 인간성회복서 연대시작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자신을 개, 돼지, 바퀴벌레, 아귀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없다. 정신적 존재를 지향하면서 성취여부와는 상관없이 가치지향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체성에 있어서 가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인간도 공생하는 존재로 가치를 몰락한 인간 존재는 그의 이웃인 인간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바람직한 생존을 위해서도 이웃과 공존해야 하고 그러므로 왜곡된 인간성은 교정되어야 하고 상실한 인간성은 회복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사람과 사람의 연대는 또 시작되기 마련이다. 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민주동지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