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양림동-근대 서양문화 창구 '광주 예루살렘'
7. 양림동-근대 서양문화 창구 '광주 예루살렘'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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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교회역사는 양림동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양림동은 단순한 교회사를 넘어 광주의 서양 근대문화 출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발전사에 큰 각인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양림동 일대를 '기독교역사문화촌'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광주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이는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 유진 벨(Eugen Bell, 1868-1925, 한국명 : 배유지)과 의사이자 선교사인 클레이먼트 오웬(Clement Owen, 1867-1909, 한국명 : 오원)이다.

이들은 1904년 12월 하순 목포에서 영산강을 따라 영산포까지 배를 타고 올라온 뒤 육로로 광주에 들어와 광주읍성 남문 밖 양림리의 동산(현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부근)에 둥지를 튼 것이다.

미 선교사들 벌거숭이 양림동에 둥지 틀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수백년이 되지만 외국인 선교회에서 직접 선교를 목표로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84년 미국 북장로회의 알렌(Horace Allen)목사가 처음이다.

그로부터 20년후인 광주에도 외국인 선교사가 직접 선교를 위해 발을 디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방법이 각 지역마다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다. 바로 의료사업과 학교사업을 통한 복음전파다.

즉 의사선교사였던 알렌은 1885년 광혜원을 설립하여 의료봉사를 시작했고 1885년 4월과 5월에 조선에 들어온 장로교의 언드우드(H.G. Underwood), 감리교의 아펜젤러(A.G. Appenzeller)와 스크랜턴(Scranton) 모자도 역시 의료봉사를 통해 기독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아펜젤러는 1885년 배재학당을 세웠고, 스크랜턴 부인은 1886년에 이화학당을 시작했으며, 1887년에야 언더우드 목사는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교회사를 시작한 것이다.

의료 학교사업 통해 의욕적 선교활동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벨과 오웬 등 선교사들은 광주에 들어와 양림동에 임시주택을 지은 이래 1914년까지 9개의 주택, 1개의 병원(기독병원), 2개의 학교(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그리고 성경학교 건물 등을 건립하며 가히 '광주의 예루살렘'을 형성하며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럼 왜 양림동이었을까.

벨과 오웬이 처음 광주에 왔을때만해도 양림동은 어린이들의 풍장장소로 이용되던 다소 음침한 벌거숭이 산이었다. 그런데도 선교사들이 이곳을 선교기지로 택한 것은 읍성에 인접해 있으면서 버려진 땅이다시피해 양림동 일대의 땅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선교사들은 버려진 땅을 개간하며 외국인이라는 저항감도 줄이면서 광주의 중심부를 향해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양림동을 광주의 명소인 '푸른동산'으로 만들었다.

3.1운동 근대음악발표회 야학 발원지

뿐만 아니라 양림동은 광주의 근대화와 개화의 촉진제 역할을 했으며 다양한 애국애족운동의 전초기지로도 기록되고 있다.

예컨대 지금의 오웬기념관 자리를 중심으로 선교사촌에서는 1911년 크리스마스때 광주최초의 연극이 공연됐으며 1918년부터는 김필례의 근대식 음악발표회가 매년 열렸다. 또 광주를 찾은 저명인사들의 강연이 열리던 곳도 오웬기념관 등지였는데 1912년에는 이승만박사가, 1914년에는 당시 미국 스탠포드대 총장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양림동은 광주 3.1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이며 광주최초의 야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광주에서는 3월10일에 터졌던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이들이 양림동의 기독교활동을 통해 개화한 교회 지도자들이었던 것.

1921년 시작된 광주최초의 야학도 광주의 초창기 교회지도자중의 한명인 최흥종 목사가 개설, 후에 전남지역 일대의 농촌계몽운동으로 번져갔다. 최흥종 목사는 1922년에는 광주YMCA를 창설하였으며 양림동에서 지금의 소록도 나환자병원의 전신인 나환자촌을 이끌기도 했다.

거기다 양림동은 고아원운동이 최초로 시작된 곳이며 일제시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투쟁의 발원지로도 전해내려 온다.

기독교역사문화촌으로 개발하자

호남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차홍준목사는 "이처럼 양림동은 광주근대화 과정에서 단순히 종교뿐만 아니라 문화역사적 현장으로서 의미가 있는 곳"이라며 역사문화촌으로 기념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각종 토론회 등 공·사석에서 양림동 선교사촌을 '기독교역사문화촌'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김광우 교수(전남대 지역개발학과)는 "양림동은 기독교의 선교방법이었던 병원과 학교 등을 통해 광주의 도시발전사에 큰획을 그었으며, 특히 문화사적으로도 일본 식민지문화와 다른 서양문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역할을 했던 곳"이라며 "선교사들의 묘와 기념관 등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므로 잘 정비하면 광주의 국제화에도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광주시는 지난해 수립한 '문화광주 2020'프로젝트에서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양림동일대를 '기독교역사문화마을'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어진 기사- 광주 교회의 역사

1904년 선교사 주택서 첫 예배

광주의 교회역사는 선교사 배유지와 오원이 양림동에 도착한 직후인 1904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예배를 배유지 선교사의 임시주택에서 보면서 시작됐다.

물론 정식 교회역사는 1906년 가을 광주읍성 북문안에 마련된 예배당이 완성된 시기로 보는 이들도 있다.

북문안 교회는 현재 충장로 3가 용아빌딩 안쪽에 자리잡은 기역(ㄱ)자 집으로 된 목조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북문안 교회는 1919년 3.1만세운동에 교인들이 대거 가담하자 일제 지배자들이 교회 땅을 매수하기에 이르자 그해 10월 남문밖으로 교회(제일교회 전신, 현 전대병원 금동주차장 자리)를 이전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시련을 겪으면서도 교인이 계속 늘어났고 교회가 남문 밖에 있어 불편을 느끼는 교인들을 위해 북문밖에도 교회를 세웠으니 지금의 중앙교회다. 이어 북문밖 교회는 1936년 10월에는 지교회인 향사리교회(현 서현교회)를 분립하는 등 끊임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양림동에 사는 교인들은 처음에는 지금의 오웬기념관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1924년 10월에야 양림교회를 발족시켰으며 1926년에는 현재 기장 양림교회가 있는 언덕 위에 붉은 벽돌건물의 교회를 완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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