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을 이어온 덕남 당산제
400여년을 이어온 덕남 당산제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11.05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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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구 덕남동 덕남마을 신극주 할아버지

▲ 신극주 옹.
빛고을노인건강타운과 덕남정수장을 지나면 분적산 아래로 호젓하게 자리 잡은 광주 남구 덕남동 덕남(德南)마을이 나온다.

40여 호 100여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마을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동쪽과 남쪽은 칠구재에서 이어온 산 능선이 노대동과 화순으로 경계를 가르고, 서쪽으로는 안산과 다릿재 능선이, 북쪽은 덕림정수장이 있는 산 능선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덕남’이란 덕고개 남쪽의 큰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는데 마을과 통하는 길은 75번, 177번 버스가 다니는 차도가 유일하다. 김해김씨가 자자일촌으로 살아온 마을은 전씨, 박씨가 더러 살고 문답산이 많은 서산 유씨 제각이 마을 뒤편에 있다.

마을의 최고령자인 신극주(92·사진) 할아버지는 1982년에 마을로 이사와 17년째 노인회장을 지내는 등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해왔다. “토착민들 얘기로는 예전엔 요 근동에서는 꽤 괜찮게 살았다고 하대. 근디 내가 와서 보니 토질이 아조 나빠, 농토도 없고. 바닥이 전부 암석이어서 농사지을 흙이 없어.”

신 할아버지는 고령의 나이에도 눈귀 어두운 기색 없이 옛 얘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놓았다.
“무등산 수박 있지? 그게 원래는 이 마을이 원산지야. 농토가 박하니까 주민들이 들농사 대신 산에다 수박, 참외 이런 걸 많이 심었어. 덕고개에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과일 덕분에 굉장히 번창을 했대요. 돼지도 며칠 만에 한 마리씩 잡고.”

덕남마을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면 단연 마을이 생긴 이래 400여 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온 당산제를 꼽을 수 있다. 일제 때 당산제를 못하도록 인근 효천주재소에서 농악기를 압수해 갔어도 주민들이 몰래 뜻을 모아 지냈다고 한다. 신 할아버지는 유학·한학에 조예가 깊다는 이유로 제관 임무를 단골로 맡아야 했다.

“우리 마을 당산제는 다른 데와 다르게 당산(堂山)신과 천용(天龍)신 두 신을 모셔. 천용신은 물을 관장하는 신이여. 아조 높은 신이제. 음력으로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시작해서 15일 지내고 16일 파제(罷祭)를 허는 아조 큰 제사여.”

하지만 해가 갈수록 힘이 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전엔 제관을 할라치면 한 달 전부터 내외가 동침도 안 허고 초상집도 안가고 짐승 잡은 것도 안 들여다보고 그 추운 정월에 찬물로 매일 목욕을 해야 했어. 얼마나 구찮허겄어. 긍께 지금은 서로들 안하려고 해.”

▲ 당산은 윗당산(할아버지)과 아랫당산(할머니)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사진은 윗당산 모습. 제사를 지낼 때는 윗 당산에 ‘천룡之神’, 아랫당산에 ‘堂山之神’ 위패를 써 붙이고 유교식 재차(祭次)에 의해서 진행된다.
내려온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당산제 덕분에 마을 전체가 평안하다는 기복의 의미로 해를 거르지 않았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꼭 챙기는 이유가 또 있다. “요 앞 노대마을이 몇 십 년 전에 당산제를 작파해 부렀는디 남자들이 멜갑시 시름시름 죽어나가. 그러고 나서는 지금 부랴부랴 다시 지내. 그러니 갑자기 무신론자가 되기도 어렵고…”

앞으로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다.
“축이나 지방을 쓸 줄 알아야제. 법도에 맞게 읽을 줄도 알아야 허고. 제사 순서는 또 어떻고. 우리 세대가 죽으믄 아마도 맥이 끊기기가 십상이여.”

신 할아버지는 당산제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전통과 옛 것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누 백년 내려온 전통을 갑자기 바꾸믄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겄어? 요즘 나쁜 짓 저지르고 뉴스에 나오는 젊은이들만 나쁘다고 헐 수 없어. 같은 민족끼리 죽도록 싸우고 남의 나라 전쟁에 군대를 보내 돈을 벌었던 나란디, 쯧쯧. 남 목숨 귀히 안 여기면서 내 목숨만 중한 줄 알제. 다 근본이 무너진 탓이여. 기성세대들이 먼저 반성해야 해.”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기미년 생인 신 할아버지는 안방 벽에 본인이 썼다는 ‘裕樂在心(유락재심)’ 네 글자를 걸어놓고 마음을 다스리려 애써왔다고 했다.

“여유롭고 즐겁기는 마음먹기 달렸다는 뜻인디 내 나이 먹어도 그게 어려워. 불가에서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 삼독(三毒)을 경계하라고 하잖혀?. 젊은이도 꼭 명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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