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 과 ‘다음 기회에’
‘꽝’ 과 ‘다음 기회에’
  • 박상은
  • 승인 2010.08.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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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은(광주푸른길가꾸기운동본부 간사)

비타민 음료의 병뚜껑을 열면 뚜껑안쪽에 ‘다음 기회에’라고 쓰여 있다.
역시나…쩝. ‘쇳복(金福)’이 없어서인 것을 누굴 탓하겠는가.

많이 당해봐서(?)인지 이젠 마치 음료의 상표, 광고 문구처럼 느껴진다. 병 포장지에는 해외여행권, 노트북 등의 흘깃한 상품이 뚜렷하다. 그러나 내가 열어본 수많은 병뚜껑에는 매번 ‘다음 기회에’라고만 쓰여 있다.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자꾸 사람을 기대하고 희망을 갖게 한다. 마치 ‘다음 기회에는 당신입니다.’라는 말의 줄임인 것처럼 느껴져서 매번 혹시나 기대하고, 매번 역시나 실망한다. 그리고는 또 혹시나 하고 기대한다.

그러고 보면 난 참 긍정적인 사람이다. 광고 카피처럼 ‘긍정의 힘’을 믿고 사는가 보다. ‘다음 기회에’의 뒤에 생략된 말을 ‘다음 기회에도 당신은 아닙니다, 쭈~욱 아닙니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던히도 지긋지긋하게 미련스럽게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나의 미련을 자랑하고 있는 건가?

언어유희 뒤엔 기막힌 상술

예전엔 ‘다음 기회에’가 아니라 그저 ‘꽝’이라고 쓰여 있었다.
‘꽝’과 ‘다음 기회에’. 결과와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루저(looser)’라는 뜻일진대, 읽는 사람은 큰 차이를 느낀다. ‘꽝’은 ‘끝’이라는 느낌을, ‘다음 기회에’는 ‘혹시나’라는 기대와 희망의 느낌을 갖게 한다. 참으로 오묘한 언어유희이며, 상술이다.

‘꽝’과 ‘다음 기회에’가 병뚜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수없이 많다. 또한 병뚜껑 속의 것보다 더욱 악랄하고 치명적이다.

MB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바로 그 언어유희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말 만들기의 최고 연금술사가 누굴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단연 ‘4대강 살리기’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4대강 살리기’는 다 죽어가던 ‘한반도 대운하’를 한방에 회생시킨 일등공신이다.

‘꽝’과 ‘다음 기회에’가 그러하듯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살리기’ 또한 그러하다. 결과가 같고, 본질은 변한 게 없는데 왠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왠지 운하는 찜찜했는데 4대강 살리기라고 하면 반대하면 욕먹을 같은 느낌. 왠지 살아날 것 같은 느낌….

이렇게 국민들의 인식에 대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지금 4대강에서는 치수와 이수를 목적으로 10여 미터 높이의 댐(보라고 우기고 있다) 16개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배를 띄우기 위해서는 수 미터의 수심을 유지해줘야 하기에 밤낮없이 강바닥을 긁어내고 있다.

그 속도는 흡사 빛의 속도다. 가끔 영산강의 승촌보, 죽산보를 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마치 사막의 모래언덕이 모래폭풍에 바뀌는 것처럼 영산강의 모습도 그렇게 하루가 달리 바뀌고 있다.

4대강 말장난 속지 않았으면

결과와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장을 찾을 때마다 ‘한반도 대운하’가 오버랩되어 보인다. 맑고 깨끗한 물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이 아니라 녹조 낀 썩은 강물을 가르며 떠있는 철선이 말이다.

지난 7월 22일 한강의 이포보와 낙동강의 함안보 공사현장에서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 5명이 MB의 ‘4대강 살리기’ 언어 연금술에 농락당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진실을 전하고자 고공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무더위와 싸우는 그들의 노고가 결코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이 말하는 ‘4대강 살리기’가 강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몇몇의 ‘4대를 먹여 살리기’임을, 또한 4대강을 죽이는 짓임을 알아줄 것을, 또한 바란다.

정치권의 이러저러한 4대강에 대한 논의들이 정치가 아닌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4대강 살리기’ 언어 연금술이 깨지고 국민이 ‘4대강 죽이기’를 당장 중단할 것을 명하기를. 그래서 우리의 강에게 진정 ‘다음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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