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모양이 다 똑같은 마을이 있다고?
집 모양이 다 똑같은 마을이 있다고?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07.28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 광산구 신창동 반월(半月)마을 정산수 노인회장

박통 때 30호 규모 새마을로 조성돼
여수에서 한양 갈 때 지나던 육로 길

▲ 정산수 노인회장.
철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광주 광산구 ‘신창동 유적지’를 지나 굴다리를 넘어서면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은 반월(半月) 마을.

판박이로 찍어낸 듯한 집들이라…. 과연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연유를 묻기 위해 동네슈퍼 2층에 있는 반월 경로당을 무작정 찾았다. 때마침 이날은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생신을 맞아 경로당 노인들에게 따뿍스런 점심과 과일을 내놓은 참이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불쑥 찾아간 길손도 반가이 맞아주었다.

남자 어른들이 많질 않아 10년 째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는 정산수(81) 어르신은 “마을을 찾아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옛날 얘기를 들려주듯 도란도란 말씀을 이어갔다.

“1977년도에 광산군청에서 취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새 마을을 만들었어요. 길 건너 마을인 ‘반촌’과 뒷마을인 ‘월봉’ 주민들이 주로 이사를 왔고 공동체 소속감이 절실했던 인근 외딴 집들도 합류해 한 마을이 됐죠. 그래서 마을 이름이 각자의 마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반월’이 된 것이죠.”

집집마다 비슷한 크기,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됐다. 군청에서는 18평 정방형으로 30호를 똑같이 지어 주민들에게 분양했다.

지금은 각 집들마다 약간의 구조변경, 증·개축을 해서 조금씩 달라 보이지 당시만 해도 내 집 네 집이 어디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반월마을은 ‘박통’이 생전에 줄기차게 주창했던 ‘새마을’의 모범이었던 만큼 30호 중 10호가 태양열 시범주택으로 조성되는 ‘선진화’도 맛봤다. 때문에 택시기사들 사이에서는 ‘반월’이라는 지명보다 “태양열 주택 갑시다”하면 더 잘 통했다고 한다.

반월마을은 첨단주민들의 유일한 산책코스인 월봉산을 뒤로하고 남향으로 조성된 마을이라 거주민들의 주거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한 집 건너 빈 집’이라는 요즘의 형편을 거슬러 오히려 가구 수가 늘어나는 기현상도 빚어졌다.

“지금은 42호 15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살지요. 한창 잘 나갈 때는 걸궁도 치고 참으로 멋지게 살았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나가서 살고 사람은 늙어지고…. 다 옛 얘기가 되었네요.”

▲ 경로당 한쪽 벽에 붙은 반월촌 노인회원 방명록. 증명사진이며 본관성씨, 출생일시, 번지수, 전화번호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그러면서 팔십 객이 된 정 회장은 이제는 절반 남짓은 고인이 된 마을사람들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힌 방명록을 보여주며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그는 마을 터로 반월마을 만한 곳이 없다며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기자에게 전했다.

“옛 어른들 말씀이 우리 마을 자리에 큰 고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각당해 없어졌다는 얘길 자주 들었어요. 그래 쟁기로 땅을 갈라치면 두꺼운 기와 편이나 숯덩이 같은 게 나오곤 했지요.”

정 회장의 마을 고전(古傳) 결정판은 ‘실크 로드’에 비견될 만한 길인 ‘과거 로드’ 얘기였다.
“우리 마을 뒷길은 여수에서 출발해 한양을 갈 때 지나던 육로 길입니다.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도 이 길을 지나야 했고 몰랭이(산마루의 방언)에 주막거리도 꽤 번창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사람들은 낡은 앨범을 꺼내보듯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를 되새기며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그리워한다. 누군가 그랬던가. 나이 서른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지나간 추억을 먹고산다고. 걸궁을 칠 때 쓰던 쇠며, 소고, 오색 띠와 고깔 등속은 아직도 창고 안에서 주인의 손을 기다리는데 겅중겅중 뛸 힘이 없는 몸은 다만 안타까워 한 번씩 꺼내어 쓰다듬고 어루만질 뿐이다.

때로 빛나던 과거는 저무는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현재의 삶을 옥죄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무슨 얘기냐 하면, 마을 입구에 자리한 철기시대 유적지로 인해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 마을 초입에 위치한 신창동 철기시대 유적.
사적 375호로 지정된 신창동 유적에서는 기원 전 300년부터 기원 후 300년 사이에 살았던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종류의 토기와 빗, 목재괭이, 빗자루 등 목재유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기와 베 짜는 기구 등이 출토돼 고고학적가치가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성주도 못하게 하고, 뭘 좀 하려고 하면 관에서 나와 간섭하고. 나라에서 봐줄 것은 어지간히 봐주면서 해야지 주민들이 여간 불편해하지 않아요.”

그 점만 빼면 반촌에서 이사와 이웃들과 함께 반월마을에서 더없는 행복을 누렸다는 정 회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