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들의 마이너 인생
58년 개띠들의 마이너 인생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5.2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은희경 장편소설 - 마이너리그 창작과비평사, 7천5백원>

난 참 이상한 습관이 있다. 주연보다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의 삶에 자꾸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감독이나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황당한 경우가 생긴다.

대학다닐 때 친구들끼리 톰크루즈 주연의 <탑건>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그 영화의 압권은 톰크루즈가 적기를 모두 격추시키고 귀환할 때, 이글거리는 태양을 뒤로 하고 착륙하던 장면과 그 장면에 깔리는 웅대한 음악이다.

그런데,난 그 멋진 화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커녕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적국의 조종사들, 그러니까 단지 주인공의 상대편에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자비한 폭격을 맞고 죽어야 했던, 그들도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관객들로부터는 죽어서 다행인 인간들이 되고 만, 그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은 치기라거나 그런 감정은 맹세컨대 절대 없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황당해하면서 나를 다소 이상한 아이로 치부했다. 진지하게 심리상담을 권하기도 했고 튀고싶어 그러는 거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난 남들 앞에서 절대로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사실 나의 뇌 구조가 바뀐 건 아니었다.
은희경이 <마이너리그>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판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 책을 샀다. 꼭 나를 위한 소설인 것 같았다.

책을 잡으니 생각보다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난 은희경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별로 몰입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주 유쾌하게 몰입하게 한다.

58년 개띠인 4명의 고등학교 동창(형준, 승주, 조국, 두환)과 그들 모두의 우상이었던 한 여학생(소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교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소설 속에서 일어났고, 그 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무협지 흉내만 잔뜩 내다가 어설프게 끝나는 폭력조직, 펜팔책을 베껴서 외국 학생들과 펜팔을 하는 국제펜팔부, 숙제를 해가지 않은 학생들에게 행해지는 온갖 종류의 고문(?)들과, 모셔오라는 부모님 대신 나타나는 중국집 주방장 아저씨까지.

대학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까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독자들의 실소만 자아내게 할 뿐이다.
항상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마이너의 인생에 호기심을 표하던 나까지, 정작 그들을 대할 때는 마이너의 인생으로 사는 것이 그들에게 마땅한 세상의 배려라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나도 모르게 마치 그들은 마이너요, 나는 그래도 그들보다는 좀 낫다는 우월감까지 갖는다. 난 작가에게 넘어가버린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보니 어떤 독자들은 '당신이 남자들의 삶을 얼마나 아느냐' '58년 개띠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등등의 비난을 했다고 한다.
은희경은 얘기한다. '이 소설은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그냥 사람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이란 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사회 속에서 모양이 만들어지고 구부러지고 닮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사회적 상황은 한때 나로 하여금 남성성에 대한 신랄함을 갖게 했다. 이제 나를 세상이 남성과 화해하게 만든 것은 삶의 마이너리티 안에서의 동료애가 아닌가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