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휠체어가 몸의 일부가 된 삶
①휠체어가 몸의 일부가 된 삶
  • 김동효 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 승인 2009.11.06 2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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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김동효의 ‘장애 톺아보기’

사람이 살아가면서 몇 번의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봅니다. 그 반전이란 것이 사회통념상 좋은 방향으로 다가보면 삶 자체가 행복해지고 활기도 넘치겠지만 그와 반대의 반전이 찾아온다면 삶이 고달프고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도 26살이란 나이에 인생의 반전이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 반전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와서 하반신마비 중증장애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걷지도 못하고 스스로 대·소변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되니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의학적으로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도와 줄 것이 없으니 잘 이겨내면서 살아가라고 하였지만, 그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다시 걸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때문에 병원에서 퇴원을 한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민간요법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무등산 도인이라는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한 달에 한번 집으로 모셔와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수련을 하였고, 스님을 하다 그만둔 사람(파계승)에게 쑥뜸을 하면 걸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에게 쑥뜸하는 법을 배워 실행에 옮겼습니다.

체력을 보호하기 위해 유황오리고와 구운 통마늘을 9번 구운 죽염에다 찍어 먹으면서 쑥을 큼지막하게 뭉쳐 맨살 위 중완과 단전에다 올려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빨간불이 쑥을 태우면서 맨살에 접근해오면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쑥뜸은 뜨는 순간만 통증이 오는 것이 아니고 뜨고 난 후에도 오는데 그 통증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고통을 참아가며 한 장에 20분정도 되는 것을 3시간씩 떴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민간요법까지 실행해 보았으나 다시 걸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서 밖의 세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집 근처의 장애인복지관에서 일러스트, 포토샵, 쿽 등 디자인관련 기술을 습득하였습니다. 집밖의 생활을 하다 보니 뭐라도 해보고 싶어 2000년에 첨단에다 ‘사랑의 징검다리’라는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경추를 다쳐 전신마비인 최중증장애인을 비롯해 몇 명의 장애인들과 사무실에 나왔지만 장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시간만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함께 나왔던 장애인들도 각자의 길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사무실은 닫고 싶지 않았기에 예전에 배운 인쇄관련 일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상호를 ‘사랑의징검다리 기획사’라 바꾸고 명함이나 전단지 등의 소일거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03년 말경에 지인으로부터 장애인 권리찾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04년 초에는 광주에 있는 몇몇 장애인단체를 소개해 주어 만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이 뇌병변장애(뇌성마비장애)인들이었습니다. 발음을 정확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장애인 당사자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장애인들 스스로가 자기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만나다 보니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대략은 알 수 있었고 그해 4월 처음으로 현장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인들도 인간이다 이동할 권리를 달라!’

이런 과정을 거쳐 장애인투쟁조직에서 일하기 시작하다보니 다른 장애인들이 나에게 집행위원장을 맡으라고 하여 광주전남장애인인권연대(현 광주장애인차별금지연대)를 맡게 되었습니다.

사고 후 시골에 부모님을 만나려 가는 것 빼놓고는 광주를 잘 벗어나지 않았던 내가 2004년에는 서울까지 올라가 강도 높은 투쟁도 하였습니다. 그해 10월에는 서울시 교육청 앞에 쳐놓은 천막에서의 노숙투쟁, 12월3일 세계장애인의 날에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삭발 투쟁 등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또 2007년 1월에는 국가인권위 11층 배움터에서 25명의 중증장애인들과 활동보조제도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전국에 있는 많은 장애인동지들과 연대투쟁을 하다 보니 정부도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2000년 이후 장애인들 스스로 정부에 요구하며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을 만들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 그리고 장애인등에 관한 특수교육법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애인복지법도 개정시켰고 최중증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는 활동보조서비스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국적인 활동과 별개로 광주에서는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인의 노동권 확보를 위한 인쇄관련 장애인작업장 ‘가온기획’,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장애인들을 위한 디딤돌장애인야학, 월 2회 쉬는 토요일에 진행되는 세 잎 크로버 장애인주말학교,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장애인의 사회적응을 돕기 위한 솟대장애인주간보호센터를 하나하나 열어가고 있습니다.

능력도 없는데 이렇게 여러 분야의 장애인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이지 않나 하고 종종 생각합니다.

우리지역에도 6만 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장애로 인해 차별받지 않고 배제되지 않고 억압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 나간다면 장애 없는 사회, 장애 없는 도시는 반드시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날을 생생하게 그리며 오늘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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