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머물게 하는 마을숲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머물게 하는 마을숲
  • 시민의소리
  • 승인 2009.06.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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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마을숲을 복원하자
⑤전북 남원시 대산면 옥전숲과 전남 나주시 다도면 고마숲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자연적인 풍토에 자신들의 삶을 조화롭게 배치하려고 노력해왔다. 자연이 가진 힘과 현상에 대한 순응은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중요한 대응방식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자연은 외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자연에 순응하지 않으면 어떠한 형태로든 되돌려 받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에 계절의 순환과 기후의 변화에 대한 경험론적 사고가 결합되어 여러 가지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이 중에서도 동양의 대표적인 것이 자연적인 풍토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사상이다.

한국의 전통마을은 대체로 산이나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앞으로는 널따란 경작지가 펼쳐지고 그 앞으로 맑은 개울이 흐른다. 풍수에서는 이를 장풍국(藏風局)과 득수국(得水局)이라 하는데, 이는 마을의 입지선정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어왔다. 그렇다고 모든 마을이 다 이상적인 형국을 갖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형의 일정한 부분이 부족하거나 넘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연적 조건의 모자람은 비보(裨補)로 보완하고 자연적 조건의 지나침은 압승(壓勝)으로 억제함으로써 환경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비보와 압승은 자연과 인간의 모순적 대립관계를 상생적 상보관계로 풀어내는 공간배치의 원리였다. 그리고 비보와 압승을 위한 가장 유용한 장치가 마을숲이었다.

전란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준 남원의 옥전마을숲

전북 남원시 대산면 옥률리 옥전(玉田)마을 앞을 가리고 있는 마을숲은 전형적인 비보숲이다. 이 마을은 남원의 명산인 교룡산(蛟龍山)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의 산자락이 소쿠리처럼 감싸고 있는데, 옥전 마을숲은 마을 앞에서 맥이 끊긴 산자락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트인 부분을 비보하여 마을을 아늑하고 안정적인 보금자리로 만들어주고 있다.

▲ 마을 밖에서 바라본 옥전숲.

마을 앞을 가로질러 150m 가량 이어진 이 숲에는 수령 250년 된 왕버들과 소나무, 팽나무 노거수들이 주종을 이루면서 서식하고 있고 느티나무, 미루나무, 졸참나무 등이 그 사이에 한두 그루씩 섞여 있다. 그 아래에는 뽕나무, 찔레꽃, 보리수, 때죽나무 등의 관목과 쇠무릎, 쑥, 개망초 등이 함께 자라고 있다.

옥전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선조 때에 박씨의 입향조가 이웃마을 운교에서 지리를 살피다가 동북쪽을 바라보니 교룡산과 풍악산 중간에 용이 생동하여 밭을 일구고 있는 형국이 있어, 크게 길한 곳이라 여겨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숲을 조성한 배경설화에 의하면, 어느 날 오도사라는 사람이 풍수지리설을 주창하며 마을 앞의 허한 부분을 보완하지 않으면 마을에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여 이곳에 숲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풍년농사가 계속되고 재물이 빠져나가지 않고 모이게 되어 마을이 융성해졌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차폐된 덕분에 전란 때도 피해를 모면했다고 전한다.

마을주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옥전숲은 원래 마을 왼쪽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길을 돌려막아 마을 앞으로 천천히 흐르게 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조성한 숲으로, 이 숲을 통과한 물길과 마을 오른쪽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마을 입구에서 만나 옥률천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마을의 복락이 바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수구를 돌려막은 것인데, 경지정리사업을 하면서 물길을 곧바로 빠져나가게 하여 지금은 숲속에 물길의 흔적만 남아 있다. 또한 제방에 조성한 숲 외에도 마을 앞 들판 한가운데에 섬처럼 생긴 숲이 있었는데, 역시 새마을운동과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없어졌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숲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금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숲이 영험력을 발휘하여 숲을 훼손한 사람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와 전란 때 숲이 마을을 완전히 가려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마을주민 박희평(76)씨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다.

“그 전에 어른들은 숲에 손도 못 대게 했제. 농사질라고 차꼬(자꾸) 베분께 나무 베면 죽는다고 했어. 실제로 둘이나 죽었어. 숲 가운데로 물이 흘러나갈 때 나무가 물길을 막아 차꼬 자기 논으로 물이 넘어온께 도끼로 찍어서 베부렀제. 그러다가 그 사람이 아픈데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 한 40년이나 됐을 거여. 내가 도끼로 찍은 것을 봤당께. 또 임진왜란인가 정유재란인가 언젠지는 모른디, 이 마을이 피난터였는디 숲이 꽉 차서 동네가 있는 줄도 몰라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지금은 길이 없어졌지만 마을사람들은 마을 왼쪽 길과 숲이 만나는 곳을 ‘숲거리’라고 해 장에나 들에 다녀올 때 쉬어가는 길목으로 삼았다. 이 마을에 사는 박희수(50) 씨는 “어릴 적에 우리는 그곳을 ‘평남거리(팽나무거리)’라고 불렀고 가을이 되면 나무에 올라 팽을 따먹고 놀았다”고 회상했다.

이 숲은 풍수적 형국보완을 목적으로 조성됐으며, 원래 물길을 돌려막은 제방에 식재돼 호안림과 수구막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계곡을 따라 몰아치는 강한 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해 주는 방풍림이었으며, 마을을 들고날 때는 쉼터가 돼주었고 아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돼주기도 했다.

원형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현재도 마을 양쪽의 산자락과 연결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숲이 마을을 완전히 가려 건너편 대산면 소재지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해를 막고 복락을 머물게 한 나주의 고마마을숲

전남 나주시 다도면 판촌리 고마(叩馬)마을은 중국의 청절지사인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마을에 행차하여 지형을 살펴보니, 말 형세의 산과 말 형국의 바위가 있어 오랫동안 머물다가 목이 말라 지석강으로 말을 채찍질해 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고마마을숲은 폭 2~3m의 둑 위에 식재되어 마을 뒤쪽에서 시작하여 마을을 크게 돌아 다시 산자락으로 연결된다. 마을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는 도로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 마을 앞으로 돌려막은 하천제방을 따라 마을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고마숲.

이 숲은 수령이 100~500년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 노거수 130여 주가 500m 길이의 줄나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산초나무, 소태나무, 가마귀머루 등과 담쟁이덩굴, 사위질빵, 으아리, 마삭줄, 댕댕이덩굴, 청미래덩굴 등의 덩굴식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고마마을숲은 마을 뒤쪽에서 마을을 향해 내려오는 두 줄기의 물길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석축제방을 쌓고 조성한 숲이다. 마을 뒤쪽에서 합류한 물줄기는 마을 오른편을 감싸고돌아 마을 앞으로 길게 이어져 흐르다 동쪽 끝으로 빠져나가 지석강과 합류한다.

홍수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으나 그 물이 마을의 복락과 함께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물길을 다시 마을 앞으로 돌린 것이다. 물길을 돌려 수해를 막고, 물길을 다시 돌려 마을의 복락을 머물게 하면서 마을 앞 들판의 곡식을 키운 것이다. 지금도 마을주민 박궁례(65) 씨는 홍수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한다.

“뒷산 젤 끝에 있는 막음창에서 병목굴(병목골)을 따라 흐른 물하고 거룽굴(거룡골)에서 흘러온 물이 흘러와 동네 바로 뒤에서 두간 디가 합친 게 여간 겁나(많아). 장마철에는 큰물이 지는디, 10여 년 전에도 동네가 바다가 돼부렀어. 그래갖고 제방을 다시 쌓았제.”

그래서 마을에서는 석축제방과 마을숲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정월 열나흩날 밤 11시에 당산제를 지내는데, 동쪽마을에서는 마을 뒤쪽 마을숲 속에 있는 할머니당산(봉분)에 제의를 올리고 서쪽마을에서는 마을 앞 할아버지당산(귀목나무)에 제의를 올린다.

당산제를 주관하는 제주는 7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궂은일은 보지도 하지도 않아야 하며, 정성을 다해 제물(삼실과, 돼지머리, 시루떡, 메, 미역국 등)을 장만해야 한다. 당산제를 지내지 않으면 병마가 마을에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지고 있고, 부러진 당산의 나뭇가지로 밥을 지어먹기만 해도 병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동제와 마을숲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숲은 전형적인 호안림이면서 강한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방풍림의 역할도 겸한다. 인근에 국민관광지인 골프장과 리조트가 들어선 뒤로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특히 여름철에는 피서객들에게 마을숲을 점령당할 정도라고 한다. 또한 마을 입구에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가지가 연결된 연리지(連理枝) 현상을 보여주고 있어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장풍과 득수의 비보적 원리

풍수의 지리적 관념은 공결이 없는 둘러싸인 경관을 길지로 보기 때문에 지형상 트여 있는 수구는 반드시 닫아 주어야 한다. 더욱이 숲을 조성하는 것은 시각적으로 수구를 막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손쉬운 방법이었다. 이렇게 조성된 비보숲은 마을신앙의 제의장소가 되기도 하고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방재림(防災林)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 마을숲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고마마을 주민들.


비보숲을 대표하는 수구막이는 보통 마을 뒷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흘러든 물이 모이는 마을 앞에 띠 모양으로 길게 조성되었는데, 이를 ‘수대(樹帶)친다’고 했다. 여기에는 수구를 막아 바람을 갈무리하면(藏風) 풍요, 다산, 번영 등 마을의 상서로운 기운이 상하지 않고, 물을 머물게 하면(得水) 상서로운 기운이 빠져 나가지 않는다는 장풍과 득수의 비보원리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수구는 단지 물이 흘러 나가는 물리적 의미의 수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마을의 상서로운 기운이 함께 흘러 나간다고 믿는 심리적인 의미의 출구까지 포함된다.

이중환(李重煥, 1690~1762)은 ‘택리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넓은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김경대 기자·정명철 전남대 문화재학 박사과정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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