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소고기
소크라테스의 소고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7.0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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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권행(서울대 불어불문학 교수)

삶이라는 것이 어디 하나 쉬운 구석이 없겠지만 그 중에도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어떤 답을 할까? 생활의 고단함을 빼놓고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 중 하나일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자 중의 현자라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제일 과제를 ‘자기 알기’로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으며 자라는 우리지만, 자기 모습을  아는 것이 쉬운 일이라면 세상이 이렇게 소란할 리가 없지 않을까.

 이탈리아 출신의 어떤 사학자가 쓴 글에 보니, 누군가의 행동이 그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따라 사람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는 일마다  남들도 자기도 이롭게 만드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에게는 이익이 되나 자신에게는 늘 손해가 되는 행동만 하는 ‘맹한 사람’이 있고, 그와 반대로 만사가 자신의 이익과 남들의 손해를 위해 진행되는 ‘도적놈’도 당연히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네 번째 유형의 인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남들도 자기도 늘 손해만 보게 만드는 자들로서 ‘얼간이’라는 이름 말고는 달리 부를 방법이 없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하는 일마다 주변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덩달아 자기 자신도 상처입고 무너져 간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얼간이 유형이 사회 어느 집단에나 일정한 비율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장, 직공, 청소부, 경찰, 군인, 교수, 기자는 물론 연예인과 정치인들 사이에도 동일한 비율로 있는 이들의 활동성이 맹렬해지는 시기가 바로 사회적 위기가 도래하는 때라고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얼마 안 되어 숭례문이 불타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 어떤 위기가 오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을 갖게 하였다. 우리들 인간이 가진 집단적 예지는 커다란 사건에서 본능적으로 상서로움과 불길함을 구분하여 느낀다.

한국인에게 숭례문이 지닌 상징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에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숭례문을 불 지르며 혼자 시원해 했을 그 자는 정확히 얼간이 유형에 드는 사람이다. 공동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자신의 삶도 망가지게 했으니 말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진정한 반성이 없는 뻔뻔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모르는 채 마구잡이로 행세하는 자들의 활동성이 사회 전체적으로 현저하게 높아져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기준으로 소고기 협상이라는 것이 이루어지더니, 우리 사회는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하여 누구나 광우병의 위험을 일상적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참 잘되었다고 박수를 치며 이제 값 싸고 질 좋은 소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편에는 제 나라 국민의 먹거리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며 촛불을 켜든 사람들이 있다.

 궁금해진다. 세상도 망치고 자신도 망치는 얼간이들은 어느 쪽일까?
 얼간이가 자신을 얼간이라고 깨닫는 일은 가능할까?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는 것이 아무래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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