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 노해경 기자
  • 승인 2008.05.07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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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문병란(73) 시인

▲ 문병란 시인
“참 우연이네? 전화 받고 깜짝 놀랐다.” 30여년 된 ‘『죽순밭에서』 판금에 대한 항의서’를 들고 1일 동구 지산동 집으로 찾아간 기자를 시인은 놀라움으로 맞았다.

하루 전 방문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고 많이 기다렸다는 것. 이유를 묻자 시인도 최근 그 항의서 관련 원고를 부산 ‘문예시대’의 청탁을 받아 정리한 참이라 했다.  

시인 문병란. “화염병 대신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시인”으로 뉴욕타임즈는 묘사했고, 주변에서 함께했던 인사들은 “무등산의 파수꾼”, “영원히 늙지 않는 끈질길 대지의 시인”으로 그를 불렀다.

교육자로서도 한 평생 큰 발자취를 남겨 “지역 교단에서 평생을 지키며 시대적 양심을 일깨우는 영양소로 문학적 삶을 몸소 보여준 큰 스승”으로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항의서 원본을 보여주자 시인은 생생한 기억으로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77년 인학사 초판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더니 79년 한마당에서 재 간행하자 돌연 판금조치가 내려졌다”며 “당시 정치보복 측면에서 민청학련 관련 인사들이 운영하던 출판사를 없애려 한 것이 진짜 목적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또 구체적으로는 음모론도 제기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문예과는 책을 읽고 요약해 오면 돈을 주었는데 「詩法」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서정주·김수영 등 모더니즘 계열에서 고발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기성의 전통에 기대지 않은 자신만의 시론(詩論), 즉 시정신(詩精神)을, 기존의 시인들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불편을 느낀 순수시의 대가 서정주 계열과 참여시의 기수 김수영 계열이 ‘외설성’을 이유로 고발했다는 것.

현실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극에 달한다. 정작 외설이라고 문제가 된 ‘황진이 사타구니 속 같은 格浦雨中(격포우중)’은 서정주의 「떠돌이의 詩」에서, ‘제미씹이다’는 구절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서 인용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연이어 출판된 작품인 「벼들의 속삭임」(1980), 「땅의 연가」(1981)도 판금이라는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30여년 전의 추억은 이내 현실로 옮겨와 있었다. 지역 원로로서 사분오열하는 민주세력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지난 10년 승리의 쾌감에 빠져 민주세력들은 이제 정체성을 상실했다”며 일신의 편안함에 빠져 너무 멀리나갈 것을 걱정하여 80일간의 벼슬 생활을 버리고 낙향해 「귀거래사」를 지은 도연명의 태도를 되새김하자고 주문했다.

“초심으로 민주세력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나라 망하겠더라”고 힘주어 말하는 시인은 앞으로 조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일반인과 더불어 시를 공부하고, 제자인 목포대학교 허형만 교수 등 그 제자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갈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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