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때문이라고?
매뉴얼 때문이라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2.18 17: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가밝아오니]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숭례문이 소방대의 치열한 진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불길에 휩싸여 속수무책으로 잿더미로 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비극적이다. 허망하고 안타깝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뭔가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저주가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듯한 무력감과 좌절감을 많은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비극이 어리석은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서민이 세상에 대한 분노를 엉뚱하게 문화재 방화로 표출한 것은 일종의 정신적 장애나 질환으로 치부되지만, 이것조차 어쩌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는 우리 사회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심리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것은 방화범 뿐이 아니다. 국보 제1호를 국민에게 되돌려주겠다며 철저한 보안장치 없이 숭례문을 개방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코앞의 이익을 위해 먼 훗날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는 습관이 이런 참화를 불렀건만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라는 허황한 꿈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운하 사업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경우 그 결과는 숭례문 화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규모의 국토파괴라는 재앙을 낳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데, 그저 두렵고 답답할 뿐이다.

언론의 보도 방식도 희비극적이다. 불을 재빨리 끄지 못한 소방대와 문화재 관리에 소흘한 문화재청을 비난하면서 화재시 대처법을 명시한 매뉴얼조차 없다고 개탄한다. 매뉴얼이라니, 지침서나 교범이라고 하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굳이 일반인이 잘 모르는 영어를 써야 하나?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소중한 문화재 관리가 허술한 것은 매뉴얼 때문이고 국민 모두 영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란 말인가? 교통사고는 운전 매뉴얼이 아니라 운전자의 과실이나 자동차의 결함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도 왕년에 군대에서 통역장교로서 교범(매뉴얼)을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군의 야전 교범은 미군이 쓰는 필드 매뉴얼(FM)을 번역한 것이었다. 미국 사람의 체격과 체력, 미국식 생활방식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지침서이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부분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았다. 가령 매일 목욕이나 샤워를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미군에게는 베트남 전쟁 중 목욕중대라는 편제가 필수적이었지만 한국군은 필요가 없었다. ‘그 친구는 에프엠 그대로야’라는 말은 정확하고 빈틈이 없지만 융통성이 부족하고 고지식하다는 뜻으로 군대에서 통용되었다.

매뉴얼 타령 이전에 상식을 벗어난 문화재 관리를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언론은 왜 숭례문의 허술한 관리 상태를 취재하여 미리 경고하지 않았는가? 숭례문 근처에 있는 신문 방송사 기자들은 평소 밤마다 노숙자들이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잠을 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문화재 취재 매뉴얼이 없어서 취재를 하지 못한 것일까?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