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살만한 곳 있소?"
"이보다 더 살만한 곳 있소?"
  • 최유진 기자
  • 승인 2007.08.21 13: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동체는 희망이다]두암주공4단지 주민자생단체연대회의

영구임대 아파트가 만든 희망의 메시지
편견과 무관심 허물고 공동체정신 회복
담장벽화·공연 등 문화아파트에 도전

지난 2003년 봄이 되기 전까지 한 가구당 7~9평 규모의 1,133 세대가 꽉 들어찬 두암동 주공4단지 아파트도 여느 영구임대아파트와 다르지 않았다.

사업에 실패하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쫓겨났다는 소문이 무성한 윗집 아저씨. 한낮에 아파트 입구 정자에서 혼자 소주 3병을 마시더니 지나가는 행인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것은 예사. 보호자 없이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 사는 앞집 치매 할머니. 생활비가 없어 무심코 긁었던 카드빚 때문에 밤잠 설치시는 어머니. 학교에서 친구 사귀는 것도 아파트 평수로 나눠진지 오래였고, 방과 후에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으로 향하지 못하고 동네 오락실이나 공원을 배회해야하는 아이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간·쓸개까지 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마음 열지 못하고 의심이 가득한 이들. 그런 주민들을 이간질하고 이용하면서도 절대 자기 것은 뺏기지 않으려는 잘난 이들도 존재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주공시민’이라고 불렀다.

보이지 않는 갈등 속에서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영구임대아파트’의 공간 속에서 이들은 더 이상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있었다.

▲ 재활용 창고 도색 작업에 부녀회 어머니들이 직접 페인트 붓을 들었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싹트다

임차인대표회의와 관리소 등이 담합해 벌인 갖가지 불법 활동으로 주민들의 불신은 극에 달해 있던 그 해, 변화가 찾아왔다. 누군가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싹튼다고 했던가.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이상은 안 된다.”“영구임대 아파트에 대한 편견을 모두 바꿔보자!”

부녀회를 비롯해 주민·봉사동아리 등 주민 자생단체를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주민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마을가꾸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4단지 부녀회(회장 안경순), 무등장애인사회복지관, 통장단 모임, 노인회, 4단지 늘푸른회 장애인 모임(회장 김병국) 등이 활동에 동력을 더했다. 2005년 송승준(50)씨가 임차인대표회의 회장으로 뽑히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노력한 성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송 회장은 ‘임대아파트도 깨끗하고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양팔 걷어 부치고 나섰다.아파트가 세워진 이후 12년간 한 번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공동화장실, 복도, 공공시설물 등에 소방호수를 연결해 물청소를 하며 묵은 때를 벗겨냈다. 함께 하는 주민들보다 “관리비가 올라갈 짓을 왜 하냐?”며 시큰둥해하는 주민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쓸고 닦고 줍자.”

도로변에 누군가 버려놓은 담배꽁초부터 일반 쓰레기, 누군가 몰래 갖다놓은 폐가구, 불법 투기물까지 전부 모았다. 며칠 새 15톤 트럭으로 2대나 모아진 쓰레기를 내다버리느라 고생 좀 했다.

그렇게 1년 반 공들인 아파트는 이제 버리는 사람보다 줍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이젠 응원의 힘을 더해주고 있다.

불법주차, 꽃나무 화분으로 해결

▲ 주차금지 경고판 대신 도로변에 꽃나무 화분을 심어 불법주정차를 막았다.
이중주차·불법주차로 빽빽한 단지 내 아파트 도로변을 지나다니던 아이들의 교통사고가 잦았다. 이런 저런 연유로 한 달에 15일 이상 119구급차가 단지로 출동하는 실정이었다. 입주자가 등록한 자가용은 140대인데 실제 주차된 차들은 300대가 넘어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머리를 모았다. 그리고 도로 가장자리 황색선을 따라 큼지막한 꽃나무 화분을 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위급한 상황에 출동한 구급차를 아파트 입구에 세워두고 환자를 들것에 실어 보내지 않아도 됐고, 교통사고도 주차위반도 눈에 띄게 줄었다.

“불법주차 막을라고 도로변에 화분 놓고 꽃나무를 심고 있었는디, 저 위층 베란다에서 누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아래로 뿌리더라고요. 내가 부녀회장하믄서 돈 빼돌려 사적으로 썼다고 누가 헛소문을 퍼트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물벼락’도 맞고."

안경순(49) 부녀회장은 "그때 생각하믄 속상한 맘이 들기도 헌디 지금은 주민들이 호응도 많이 해주고 결과가 조응께 옛날 생각 하면 웃음만 절로 나요”라며 웃어 보였다.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현정애(28) 무등사회종합복지관 복지사는 “이분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땅 일구고 씨 뿌리느라 고생들 많이 하셨어요. 복지관도 주민들 환경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기관 한 곳이 모든 주민들에게 도움 주기가 쉽지 않거든요.”라고 말하며 주민에게 공을 돌렸다. 하지만 송승준 회장, 김병국 회장, 안경순 부녀회장은 “복지관이 실태파악이며 임대아파트 주거 환경 개선에 관련된 토론회, 활동 계획부터 실행까지 하나하나 신경써주면서 도움을 많이 줬어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한사람이라도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서로를 추켜 올린다.

송 회장이 ‘안전 아파트’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하나 더 일러줬다. 바로 한 달에 평균 70, 80만 원정도 모아지는 재활용품 수익금으로 조성된 1천만원에 이르는 기금으로 치안유지용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단지 내에 낡고 오래된 시설도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김병국 늘푸른회 회장이  한마디 보탰다. “대부분 영구임대아파트는 장애인들이 생활하기 매우 열악해요. 저희 단지 1,133세대 중에서 280세대가 장애인 입주자예요. 휠체어 경사로부터 출입문 통로까지 어느 한 군데 장애 이동권을 보장하는 곳은 없어요. 얼마 전에 장애인 전용 주차장이 생겨 많이 편해지긴 했지만 출입문 경사턱 설치부터 실내 안전바, 장애인용 맞춤형 가구 구비 등 모두 장애인 부담으로 돌아오게 되죠. 영구임대아파트 중 몇 퍼센트는 장애인을 위한 공간으로 기획하고 설계해줄 수 없을까요?”

이젠 ‘문화 아파트다!’

아파트 입구에 마을 주민이 힘을 모아 그려 넣은 화사한 색의 벽화도, 곳곳에 잘 가꿔진 꽃나무 화분들도, 올해 초 아시아문화중심도시 마을가꾸기 프로젝트에 선정돼 생긴 널찍한 야외공연장도 영구임대아파트에 대한 주변의 인식을 전환시키고 있다.

흥겹게 아파트 자랑을 늘어놓던 송 회장은 한 가지 고민을 털어 놓았다. 공연장은 생겼지만 마땅한 공연이 없다는 것. 그는 “다른 분양 아파트는 ‘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초청공연도 많이 부르고 자선공연도 많이 하던데, 아직 시민들 인식에는 임대 아파트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많이 남아있어서인지 공연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어요. 대학생 풍물패들이나 동아리 그룹 가수들이 공연도 보여주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곳 사람들 따로 시간 내고 돈 들여서 영화 보러 가거나 공연 보러 가지 못하잖아요.”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하지만 송 회장은 취재 끝자락에 “북구만 해도 영구임대아파트가 5곳이나 있지만, 저는 그 중에서 두암4단지가 가장 사람 살기 좋은 아파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지만요.”라며 노트에 빼곡하게 적은 하반기 사업 목록을 펼쳐보였다.

안 부녀회장도 “제가 최근 몇 년 사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가만히 주저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는 거예요”라며 “처음엔 힘겹더라도 작은 힘을 모아 하나씩 이뤄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요?”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 한 달에 한번 ‘주민자생단체연대회의’를 열어 아파트 가꾸기 사업에 대해 협의하는 자리를 갖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