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숲을 시와 그림으로 수놓다
콘크리트 숲을 시와 그림으로 수놓다
  • 이국언 기자
  • 승인 2007.04.19 12: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동체가 희망이다]⑬시화(詩畵)가 있는 ‘문화마을’

▲ 이재길 시화 문화마을 조형연구소 소장이 시화가 있는 문화마을 조형물 앞에서 방문객들에게 사업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문화 중심도시, 먼저 이웃과 함께 ”

밋밋하고 삭막하기까지 한 아파트 담장도 이들에겐 하나의 캔버스였다. 후미진 골목길마저도 사람들 발길을 붙잡게 하는 소중한 창작공간이었다. 마을 골목 골목, 아파트 담장 담장을 아름다운 시화(詩畵)로 수놓고 있는 광주시 북구 문화동 주민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동광주IC와 제2순환로 입구에 위치한 문화동. 광주 동북방면의 관문 구실을 하는 교통 요충지면서도 동쪽으로는 무등산의 지맥인 군왕봉과 세자봉으로 이어지는 산세들이 포근하게 동네를 품고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이다. 도시 외곽 변두리였던 문화동이 지금 도시형 마을가꾸기 사업을 배우려는 외지인들의 발길로 붐비고 있다.

문화동 주민들이 마을가꾸기 사업에 나선 것은 지난 2000년부터. 동 주민자치위원회(위원장 김상근)가 발족하면서 북구청이 시행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에 무릎을 맞대기 시작한 것이다. 첫 해인 2000년엔 각화 도매시장 인근에 방치되다시피 한 공터를 깨끗이 청소한 뒤 화향목을 심어 단장에 나섰다.

‘시화가 있는 문화마을’로 본격적인 터를 다져가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다. 많은 곳에서 마을가꾸기라면 담장을 허물거나 시설을 뜯어 고치거나, 조경시설을 갖추는 데 눈을 돌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담장을 허무는 것도 좋지만 담장을 허무는 것으로 이웃과 가까워 질 수 있을까 생각했던 거죠. 담장을 허무는 대신 그곳에 다시 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드는 것 보다 뭔가 이웃 주민들과 어울리고 정신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게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들이 모아지게 된 겁니다.”

조각가 이재길(39)씨의 얘기다. 문화동에 일찍이 개인 창작실을 마련해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그는 ‘시화가 있는 문화마을’ 조성사업 시작 과정에서부터 깊이 발을 담가 왔다. 지난해부터 아예 ‘시화 문화마을 조형연구소’를 꾸며 문화마을 조성을 놓고 주민들과의 본격적인 동고동락에 접어들었다.

‘시’와 ‘그림’을 소재로 한 발상은 참신하긴 했지만 추진 과정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시’와 ‘그림’은 콘크리트로 가득한 도시의 문화와 어울리기에는 아직 생소한 감이 없지 않았고, 그만큼 이들 영역 스스로도 삶의 터전인 지역 주민들과는 다소 떨어진 영역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시화 그림으로 가꿔진 각화초등학교 통학로.
주민 스스로 지역문화 앞장...시인·화가·조각가도 손 맞잡아


주민자치위원회는 그 방법을 주민들 속에 찾기로 했다. 몇 차례 주민설명회를 통해 의견을 구한 끝에 지역 주민들이 좋아하는 ‘애송시’를 추천 받아보자는 것이었다. 본인이 남기고 싶은 자작시도 좋고 마음속으로 읊조려 본 애송시도 좋았다.

5만원 정도의 자부담이 필요했지만, 주민들은 기꺼이 이 돈을 부담하며 골목길 가꾸기에 화답했다. 2002년 시화마을 조성 1호 사업이 시작된 첫해 그렇게 서른 명이 넘는 주민이 자신의 이름으로 시화를 내 걸었다.
한편으로 자치위원회에서는 관내 초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주최했다. 결과는 대성황이었다. 2004년 200여명의 학생이 참가한 백일장 대회의 수상집을 묶어, 그해 12월 성대한 출판 기념회까지 열었다. 동 자치위원회가 학생 백일장 대회를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방법을 주민들 속에서 찾았고,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계기로 난관을 극복해 나간 것이다.

정감이 있는 문패 사업에는 톡톡 튀는 문구와 인사말을 새겨 모두 64 가구가 참여했다. ‘행복이 가득한 집’ ‘파라다이스’, ‘보금자리’, 조롱박 문양, 책 모양, 나무 모양 등 가지가지 문양과 문구의 문패가 그것이다.

시화가 있는 마을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욕심을 조금 더 부렸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할만한 시인들에게 직접 친필로 시를 부탁해 보자는 것. 여기에 지역 중견 화가들까지 동참했다. 주옥같은 시에, 그 시의 분위기를 흠뿍 전하는 그림까지 어울렸으니 미술관이 거리로 옮겨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광은 시인의 ‘산 안개’는 박행보 화백의 문인화로, 문창식 시인의 ‘달연시’는 박태후 화가가, 전원범 시인의 ‘작은 것들’은 이병오 화가가, 문병란 시인의 ‘매화연풍’은 한상운 화가가 각각 공을 들였다.

특히 지난해엔 시에 문인화, 동양화까지 접목해 한 차원 높은 예술적 가치로 승화시켰다. 권위로 상징되는 동양화가 거리로 나와 아파트 담장의 타일로, 길거리 한 켠의 예술 작품으로 직접 주민들과 대면하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동네 분위기도 한결 달라졌다. 과거 쓰레기가 쌓이기 십상이던 장소에 아름다운 시와 조형물이 대신 들어서고, 후미진 골목길도 한층 밝아졌다.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시’와 ‘그림’을 먹고 잠자고 생활하는 삶의 터전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기쁨이다.

고급 호텔이나 강의실, 화랑에서만 이뤄지던 시 낭송과, 전시회 등이 문화의 직접적 수요자인 대중들 곁으로 다가왔다. 갇혀있던 문화가, 한꺼번에 거리로 터진 것이다.

시화 문화마을은 이미 중장기 마을 발전 구상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기반 조성에 충실했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한 차원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엔 문인, 서예, 판소리 분야의 중진들이 포진한 ‘시화 문화마을 조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한 상태다.

마을 위 등산로 숲과 들산제를 연계한 시화 생태공원을 추진하는 한편, 야외 공연장을 만들어 광주의 문화 오아시스 기능을 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시화 문화마을은 지난달 건설교통부의 ‘살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범마을 공모에서 전국 25개 마을 중 최고 점수로 선정돼 2~3억원의 사업비를 받는 경사까지 누리기도 했다.

“광주 비엔날레가 2개월 반짝 하다가 다시 2년 동안은 창고나 다름없이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광주 문화 중심도시가 조성 되고 있는데 건물 하나 그럴듯하게 세워 둔다고 되지 않죠. 대중들 곁으로 다가가 그 시민들의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하겠죠.”

삶의 터전에서 자원을 찾고 희망을 발견했다는 이 소장의 문화에 대한 단상이다.

▲ 문패 제작.

“적극적인 주민 참여로 가치 창조”
[인터뷰] 김상근 광주 북구 문화동 주민자치위원장

시화 문화마을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모범 사례로 소개된 데 이어, 사례 탐구를 위해 전국에서 찾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중앙 및 지방의 140여개 기관 단체 등 약 4천여명이 문화마을 추진 과정을 살피고 갔다. 일본, 미국 등 관련 연구진들의 방문도 잇따랐다.

김상근(76) 문화동 주민자치위원장은 “덕분에 저도 갑자기 유명인사가 됐다”고 너스레다.

시화 문화마을 조성이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무엇보다 김 위원장을 비롯한 주민자치 위원들이 혼연일체가 됐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 않는 사업비를 받아들고 매번 십시일반 더 보태 헌신했던 노력들도 빠트릴 수 없는 대목이다.

김 위원장은 지역민들 사이에 ‘아버지’로 통한다. 그 덕에 주민자치위원회가 창립된 뒤 내리 7년째 위원장을 장기 집권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북구 관내 26개동에 내리 위원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며 “나이도 있고 해서 그만 두려고 해도 자치위원들이 농성까지 하며 가만 놔두지 않는 통에 할 수 없이 한 번 더 맡게 됐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만약 순전히 돈을 들려 추진하려고 했더라면 지금의 1/10도 어림없었을 것”이라며 “주민들이 스스로 동참하고, 모두 헌신한 결과 덕분에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그 몇 십배의 가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5·18 묘역을 찾는 추모객들만 한해 600만여명인데, 마땅히 차 마실 데도 없어요. 망월동에서 10분 거리인데다 문화중심도시에 이런 마을이 있다면 전국적인 명소가 될 것입니다.  꼭 될 거요.”

김 위원장의 다부진 포부였다.

   
 
  ▲ 김상근 문화동 주민자치위원장이 2002년 현장을 찾은 외지 방문객들에게 시화가 있는 문화마을 사업을 소개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