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마을 주민 똘똘 뭉쳐 골프장 막아냈습니다"
"온마을 주민 똘똘 뭉쳐 골프장 막아냈습니다"
  • 이국언 기자
  • 승인 2007.04.12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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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희망이다]⑫구례 산동면 사포마을

▲ 지리산 성삼재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사포마을 전경. 산수유꽃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기도 하다.
‘산수유’ 테마 제1의 생태 마을 꿈꿔

여인네 허리 같이 이어진 유려한 돌담길, 마을을 좌우로 안고 흐르는 작은 시냇물. 겨울을 저만치 밀쳐 냈던 산수유 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이제 벚꽃과 개나리가 대신하고 있었다. 장독대 넘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사포마을은 아직 봄 잔치가 한창이었다.

전북 남원과 경계에 있는 산동면은 구례군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만복대, 정령치로 이어지는 지리북부 능선의 품속에 난동, 온동, 당동, 방광, 수월, 월곡, 용전, 사포... 등의 마을이 살포시 안겨있다. 사람들은 지리산을 덮은 흰 눈을 초봄까지 바라다보며 들판으로 나선다.

사포마을에는 현재 33가구 주민 85명이 살고 있다. 노고단, 성삼재로 내려오는 산줄기 끝자락으로 갈퀴같이 밭을 일구고, 그 아래로는 그만그만한 다랑이 논들이 연이어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있죠. 그 맑은 물로 농사를 짓고 있으니 얼마나 밥맛이 좋겠습니까.”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우선 산 좋고 물 맑은 동네 자랑이었다. 주민들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별다른 정수시설 없이 식수로 이용하고 있었다. 대대로 내려 온 방식이지만 아직까지 속병 한번 없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 사포마을 주민들이 마을 장승 앞에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따. 장승은 악을 쫓고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세운 것으로 장일주 이장과 마을 청년들이 고생을 자처했다.
논농사도 없지 않지만 이 마을의 가장 큰 수입원은 무엇보다 산수유다. 사실 산동면 전체가 골골이 산수유 마을이지만, 산수유로 치면 단연 사포마을을 꼽는다. 큰 수입은 없지만 객지로 나간 자식들 콩, 팥 농사 지어 보내주는 재미로 오손도손 산다는게 주민들의 얘기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산골 오지 중의 오지였지만, 95년 마을 아래쪽에 지리산 온천랜드가 개장하면서 부터는 교통이 한결 손쉬워 졌다. 마을 코앞까지 연일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가 들락날락 하고 있지만, 지리산의 육중한 산세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지금도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시골마을에 평지풍파를 몰고 온 것은 2004년 초여름 경이다. 마을 바로 위쪽 일대의 땅을 알게 모르게 매입해 오던 (주)지리산 온천랜드 측이 난데없이 27홀 규모의 골프장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

“골프장 생기면 주민들한테 이익이 돌아간다고 하지만, 풀 뽑으러 하루 대여섯명씩 가서 일하는 것 가지고 그게 어디 소득원이나 될 수 있나요. 군에서는 지방세수 확충에 도움이 된다고 선전하고 다니지만, 오히려 골프장으로 민원 발생하면 그 민원 해결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더 많다는 거예요.”

사포마을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운주(74) 위원장의 설명이었다. 개발업자의 화려한 말  치장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입장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높은 산을 깎아 골프장을 만드는 과정에 큰 비라도 내리면 마을 전체가 흙탕물을 뒤집어 쓰지 않을 수 없고, 맑은 계곡물도 더 이상 식수로 이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승주, 함평, 화순 등 전국의 골프장이 있는 곳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하는 말이 하나같이 똑 같았어요. 자기들은 비록 싸움에 실패했지만 골프장이 생기면 더 이상 못 살고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똘똘 뭉쳤죠.”

교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책위원장직을 떠맡게 된 박 위원장은 그때부터 동분서주하며 투쟁에 나섰다. 마을 주민들이라야 채 100명도 못 되고 그나마 대부분 60대 넘은 노인들이었다. 박 위원장과 주민들은 동네 트럭에 스피커를 달고 한 손에는 원고를 들고, 구례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골프장 개발의 부당성을 알리고 다녔다.

▲ 원안은 생태 체험마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
구례뿐이 아니었다. 1인 시위를 위해 때론 광주로, 집회를 위해 때론 서울 여의도로 2년을 넘게 그렇게 완강하게 맞서 싸웠다.

“한 발만 옮겨도 다 돈입디다. 그래도 도시락 싸 들고 버스 빌려 타고 다니며 투쟁했지요. 나중에 자식들 고향이라고 찾아 올 것인데, 마을마저 없어져 버리면 올 데도 없을 것 아닙니까.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죠. 그냥 여기서 살도록 냅 두라는 것입니다.”

개발업자 측도 쉽게 물러설 리 없었다. 영업방해와 명예훼손 등으로 혐의로 주민들을 무더기 형사고발을 한데 이어, 10여명이 넘는 주민들에게는 가압류 처분을 내렸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부자지간에 각기 가압류 딱지가 붙어 일체의 재산권 행사를 막기도 했다.

“여태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던 사람들에게 가압류 딱지가 뭡니까. 이름만 바꿔 고발장을 남발하는 통해 몇 년 동안 오라 가라 불려 다니느라 농사하나 챙기지 못했습니다. 참 더러운 꼴 보고 살았죠”주민들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지난 2004년 9월 15일에는 주민 폭행사건까지 발생했다. 개발업자 측 관계자 40여명이 몰려와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 위원장의 부인 오영진(67)씨를 다짜고짜 폭행한 것이다. 자식 나이뻘로 보이는 이들은 이를 말리러 달려 온 동네 할머니들까지 길바닥에 내 팽개쳤다.

당시 폭행사건으로 주민 6명이 남원의료원에 입원했다. 병원비만 900여만원이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치료비 한 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법원은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지난 2월 박운주 위원장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완강한 주민들 기세에 밀려 결국 개발업자 측은 한발 물러난 상태다. 안성철(83) 할아버지는 “늙은이들만 있다고 시피 보는 것이 제일 분하다”며 “그 일을 겪고 더 똘똘 뭉치게 됐다”고 말했다.

“부자도 없고 똑똑한 체 하는 사람도 없어요”


▲ 장일주 이장.
아직 골프장 개발 문제가 최종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사포마을은 요즘 여느 때 없이 변화를 맞고 있다. 청정 산수유 마을을 지켜낸 기운을 몰아 자연도 지키고 문화도 가꾸는 일에 모두 나서기로 한 것.

궂은일을 자처하고 나선 이는 올해 새로 이장을 맡게 된 장일주(51)씨다. 도회지 생활을 접고 지난해 초 귀농한 장 이장은 “화급한 마을 현안을 두고 젊은 사람이 앞서 힘을 보태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산수유와 청정 마을을 자원으로 한 생태체험 마을을 꾸미면 전국 최고의 명소가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액운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마을입구에 장승과 솟대를 세운데 이어, 올핸 공용화장실을 갖추고, 시멘트 담을 허물고 돌담길을 복원할 계획이다. 특히 마을의 자연 경관을 그대로 살린 실개천, 돌담길, 산수유, 소나무 숲, 대 숲으로 이어지는 2.5㎞의 테마 산책로는 더 없는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 마을은 부자도 없고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도 없는 동네입니다. 너무 차이나도 소외 돼서 못 삽니다. 벌어 놓은 것은 없어도 세끼 밥 먹고 배 따뜻하게 살면 그만 아닌가요.”

농사 밖에 모르고 살았다는 사포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자랑이자 꿈이었다.

"마을 지켜낸 주민이 자랑이지요"
[인터뷰] 박운주 지리산골프장 반대 사포마을 대책위원장

   
  ▲ 지리산 골프장 반대 사포마을 대책위원장  
 
"전국의 골프장 반대 운동이 다 실패했는데, 유일하게 사포마을이 지켜냈다고 하더군요. 목련장 훈장도 받아봤지만 그에 비하겠습니까. 이 보다 더 소중한 상은 없어요. 마을 주민들이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아름다운 재단'(이사장 박상증)은 지난해 12월 공익 시상 '아름다운 사람을 찾습니다'의 수상자로 박운주(민들레홀씨상) 위원장 외 3명을 선정해 시상했다. 지난 2004년 대책위원장을 맡아 3년여 동안 줄 곳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애써 온 공로다. 지난해 10월에는 '제1회 지리산문화제'를 개최해 생명 존중 의식과 마을 화합에 앞장서기도 했다.

지난 98년 중등교사를 정년퇴임한 박 위원장은 그때부터 이 마을에 정착해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해 왔다. 골프장 투쟁으로 형사처벌까지 받고, 부인 오씨는 아들 뻘 나이의 청년들에게 폭행당하는 모욕까지 겪어야 했다.

박 위원장이 '아름다운 재단'에서 수여한 상은 가장 뿌듯하게 간직하는 이유는 바로 87년 먼저 떠난 딸 때문이다. 박 위원장의 차녀는 서울교대 2학년이던 87년 2월 비민주적 학사 행정과 전두환 군부독재의 현실을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산화해 간 고 박선영 열사다. 

박 위원장은 "딸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며 "조금이나마 딸의 정신을 잇는 일이라 생각해 나서다 보니 어려움도 몰랐다"며 마을 주민들에게 그 공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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