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웃음소리 들리고 마을이 명물됐어요"
"아이들 웃음소리 들리고 마을이 명물됐어요"
  • 이국언 기자
  • 승인 2007.02.15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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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희망이다]⑤문화공간 '오래된 숲'

폐가위기 한옥 무대로, 사라져가는 마을공동체 복원 나서

▲ 장흥문화연대와 오래된 숲 운영진들이 툇마루에 앉아 녹차에 담소를 나누고 있다.

송산 마을회관이 오늘도 할머니들의 신발로 가득하다. 봄 날씨 덕에 서서히 농사 준비에 나선 사람도 없지 않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들에 나가기는 아직 이른 철. 한 겨울 사랑방을 독차지 해 왔던 할머니들은 오늘도 10원짜리 화투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날씨도 날씨지만 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여느 때 없이 따뜻한 겨울이었다. 빈집만 늘어가던 마을에 처음으로 새 식구가 들어 온 것도 그 중 하나이지만, 무엇보다 가진 것이라고는 주름진 손 밖에 없는 농민들의 푸념과 한숨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이들도 이 젊은이들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장흥문화연대 회원들이 장흥군 덕계리 송산마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지난 2005년부터. 문충선(44)씨 등 몇 몇 회원들이 주축이 돼 있는 폐가 위기에 몰린 전통 한옥을 인수해 문화마당 ‘오래된 숲’을 열면서부터다.

계기는 2005년 문화관광부 ‘생활 친화적인 문화공간 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다. 지역 문화를 가꾸고 특히 농촌의 사라져가는 마을 공동체를 복원시키는데 관심을 모아보자는 뜻이었다. 몇몇 회원들이 힘을 보탠 덕에, 더불어 80여년 내력의 한옥까지 함께 건사하게 됐다.

▲ 문화학교에 참가한 아이들의 한옥 집짓기 연습시간. 제법 모습이 다부지다.

장흥 문화강좌,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 독서 문화학교, 지역 문화단체와 함께 ‘삶의 문화 강의 노래, 탐진강 마을 프로젝트’, 사진 미학 에세이, 어린이 프로그램 ‘땅에는 풀꽃 하늘엔 별꽃’ 프로그램 등…. 오래된 숲’은 이 한옥을 무대로 이름 그대로 여러 가지 문화마당을 펼쳤다.

문화란 책장을 뒤지거나 고상하고 거창한 무엇이 아니었다. 여름 독서학교의 경우 강변에서 물놀이를 하고, 들판에 무성한 풀과 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강을 따라 민물고기를 탐사하는 식이다. 또한 한옥을 통해 우리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엿보고, 연을 만들어 보고, 마을 구석구석을 발로 누비며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의 지난 역사를 들어보기도 했다.

처음엔 미심쩍어 하는 시선도 없지 않았다. 정부에서 ‘뭔 돈을 받으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마을의 안녕을 바라며 솟대를 세우는 그들의 땀방울에서 진정이 엿보였다. 마을 주민들도 흔쾌히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깃불 피우며 영화보고, 주민들 삶의 발자취 사진에 담아

▲ 사진이 내걸리자 마을회관 사랑방이 한결 밝아졌다. 고단한 노동에 주름진 살결이지만 다시봐도 애틋한 얼굴들이다.

지난해 여름에는 이 집 마당이 사랑방 노릇을 했다. 빔 프로젝트를 통해 20~30년 전 장터 가설극장에서나 보던 영화를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함께 구경한 것이다. 30여호 남짓 60여명 주민 중 학생이나 젊은 사람 축만 빼 놓고는 전부 마당 앞으로 모였다. 모기를 쫓는 쑥불 연기 속에서도 ‘서편제’, ‘왕의 남자’, ‘황산벌’을 보면서 함께 웃고 울었다.

지난해 가을에는 민간 씽크탱크인 희망제작소의 ‘지역희망 찾기’ 연구사업의 하나로 송산마을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일상의 풍경과 모습을 사진에 담고 주민 인터뷰를 통해 살아온 내력, 하고 싶은 얘기, 희망을 영상에 담아 낸 것이다.

장작 패는 모습, 오토바이를 몰고 장에 다녀오는 모습, 마을 동네 회의, 마당에서 고추를 다듬는 모습, 머리에 수건을 둘러 쓴 사람, 낫 들고 일하는 할머니…. 마을을 지키며 흙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길러낸 그들의 숨결, 그들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회관에 들어오면 벌써 방이 훤해 보여. 우리가 언제 다시 사진 찍겄소. 이중에 올해 돌아가실 양반 생길지도 모르제만, 두고두고 추억이 될 것 아니여. 우리랑 같이 사진 찍었는디 가 버렸다고 얘기할 것 아니여…”

그동안 촬영한 사진들을 10여일 전 마을회관에 내 걸었는데, 사진은 지금도 얘깃거리였다. 이덕남(76) 할머니에게 사진을 가리켜 달라고 했더니 한사코 뿌리치신다. 꼬치꼬치 캐묻자 하는 말이 “쑥떡같이 생겼어도 이왕 인절미 같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 팔순이 가까워 온 그 나이에도 주름 깊게 패인 얼굴을 비추기가 못 마땅했던 모양이다.

사실 사진이 걸린 날 난리가 났다. 왜 나만 안 이쁘냐고 하는가 하면, 이왕이면 불이 환히 켜진 곳에 걸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더라고. 또 한 바탕 웃음 잔치가 벌어진 것. 송산마을 이장 박종문(69)씨는 “사진을 봐도 다시 봐지고 다시 봐지곤 한다”며 연신 흐뭇한 표정이다. 

이왕 분위기가 탄 틈에 마을 청년회 ‘덕송회’에서는 올해 마을 앞 강변 솔밭 중간 중간에 새로 나무를 심기로 했다. 40여년 전 마을 청년들이 방풍림 겸 이곳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여름엔 더 없는 쉼터이자, 겨울엔 백로, 왜가리와 물오리 떼로 장관이다. 40여년 전 후대들을 생각해 마을을 가꿨던 그 선배들의 전통을 다시 이어갈 참이다.

“정월 대보름에는 지신밟기를 할 참이다. 가족마다 솟대를 깎아 솔길에 세우고, 뚝방으로 나가 동네 어르신들과 음식도 나눠먹고 한바탕 같이 노는 거죠.”

마을 창고에 먼지를 둘러싸고 있는 꽹과리 북이 오랜만에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송산마을이 올 한해도 적잖이 시끄러워질 판이다.
 

“그냥 얘기를 들어주면 좋아 하시죠”
[인터뷰] 문충선 문화마당 오래된 숲 대표

   
 
  ▲ 문충선 문화마당 '오래된 숲'대표  
 
“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신뢰가 더 다져지게 됐죠. 마을 어르신들은 차분히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면 다들 좋아하십니다. 자식들이라야 1년에 한 두 번 내려올까 말까 하는데 늘 외로운 거죠.”

문화마당 ‘오래된 숲’ 문충선 대표의 말이다. 사실 문화마당이 있기까지는 지역 현장에서 활동방향을 찾는 지역 문인, 환경, 예술 단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장 큰 힘이었다. 

“예전의 문화를 이어가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거든요. 노동환경도 달라졌어요. 기계농이나 시설농이 많다보니 같이 모여 일할 기회도 많지 않거든요. 전통적 의미의 품앗이도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죠”.

산업화란 이름으로. 개방화란 이름으로 농민들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와 함께 모든 가치도 파괴되고 사라져 갔다. 농촌도 이제 농촌 자체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는 환경. 문화도 마찬가지다.

문 대표는 “달라진 시대만큼 농촌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는 것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모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도시와 농촌이 상생할 수 있는 큰 틀의 도농공동체 문화를 적극 마련하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문 대표는 “마을 어르신들이 올 겨울에는 왜 영화 안 트느냐고 난리다”며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삶의 또 다른 친숙한 공간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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