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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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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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와 그림]-임동확
설법 ― 조계산에 내리는 비

이 골짝 저 산등성이 구분 없이 비가 내린다

보조국사 지눌이다, 대각국사 의천이다 선종이냐, 교종이냐 편 가르지 않은 채 소낙비 맞고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 사이의 고갯길 원추리 꽃 한 송이 활짝 피어 있다

좌파다, 우파다 돈오냐, 점수냐 따져 묻지 않은 채 아직도 이것이냐, 저것이냐 네가 틀렸다, 아니다 내가 옳다 아웅다웅하는 중년부부의 걷어 올린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시며 조계산 중턱에 장맛비가 쏟아진다

키가 크거나 작거나, 음지거나 양지거나, 먼저거나 다음이거나, 다급하거나 여유가 있거나, 이미 저버렸거나 피어 있거나, 혹은 피어날 것이나

늙은 상수리나무는 상수리나무대로, 어린 산죽은 산죽대로 당당하게 푸른 칠월 중순의 한낮

계곡은 각자 달라도 급하게 우당탕탕 흘러가는 빗물은 질긴 인연처럼 결국 순천만 그 어디쯤의 바다에서 하나로 뒤섞일 뿐이라는 듯 비는 동서남북, 남녀노소, 상하귀천, 세간과 출세간, 지옥불 같이 뜨거운 욕망과 얼음짱처럼 차가운 이성을 차별하거나 나뉘지 않은 채

때로 대립하면서 협력하고, 때때로 협력하면서 대립하며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있다

더욱 굵어진 빗줄기에서 그만큼 더 간절한 합환(合歡)을 꿈꾸는 먼 산의 자귀나무 한 그루, ‘차나 한 잔하고 가라’고 말하려다 머뭇거리듯 온 숲과 함께 젖은 채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 강홍순 作 조계산
[시작노트]
오늘의 우리 사회가 급속히 양극화되고 있다. 그러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좌파니 우파니 하며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섣부른 범주화 또는 이분법은 자기편이 아니 거나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를 적대시하거나 행여 무서운 살육을 부른다는 것을 우리 역사는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얼마 전 송광사와 선암사가 속해 있는 조계산을 오르며 나는 때마침 이것저것을 구분하지 않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과연 타자와 공존하지 못하는 배타적인 이념과 종파가 과연 얼마나 가치 있을 것인지 가만 물어봤다.

임동확
1959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졸(석사).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운주사 가는 길』『벽을 문으로』『처음 사랑을 느꼈다』『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시화집『내 애인은 왼손잡이,』
5·18 20주년 기념 시선집『꿈, 어떤 맑은 날』
산문집 『들키고 싶은 비밀』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등을 펴냈다.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겸임)로 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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