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애기 동백 한 그루
저 애기 동백 한 그루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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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시와 그림] - 임동확

저 애기 동백 한 그루
―청산도(靑山島)에서
임동확

검은 밤바다의 등대처럼 접근 불가능한 고독, 거칠고 모진 파도처럼 이겨낼 수 없는 가난, 너와 나 사이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막막한 거리가 밭둑가에 애기 동백으로 피어나고 있는 섬.

그래서 입으로만 이어지는 입도조(入島祖)의 비밀이 어디론가 끝없이 밀항(密航)을 재촉하고, 늘 불온하고 위태로운 제 운명을 하늘 멀리 날려 보내고자 소지(燒紙)하는 것처럼 불타오르는 새 천년 아침의 태양 앞에서도 여전히 달라질 줄 모르는 난파선 같은 한 세계가, 스스로가 소망하는 걸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그걸 열망하며, 난바다 한 가운데 고집처럼 멈춰 있다.

그러나 애가 타도록 휘돌아 가거나 가파른 내리막 또는 오르막이 이어지는 고갯길. 절벽처럼 단호하고 완강한 슬픔이 만든 해식애(海蝕崖). 갑작스런 망각과 이별이 두려운 연인처럼 비바람 속에 홀로 젖어가는 초분(草墳). 그리고 유한하기에 결코 어떤 눈길도 닿을 수 없는 무한한 마음의 마늘밭에 거름을 뿌리며 부르는 늙은 아낙네의 거룩한 노래 한 소절 속에 다시 거듭 태어나는 청산도여.

사방이 수평선인 거기에 가면 1월의 바다처럼 투명한 명증과 마냥 두렵지 않은 풍랑 같은 불가사의가 돌담의 담쟁이처럼 어우러져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출항과 끊이질 않은 귀항의 반복 속에서도 영원히 지속되는 그 어떤 움직임, 알 수 없는 낯선 힘이 누군가를 떠나온 곳으로 세차게 밀어가고 있다.

▲ [꿈-애기동백] 김해성作
[작가노트]
몇 년 전 새 천년이 시작되는 첫날 아침의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일가족과 함께 방문했던 청산도에서 유난히 꽃송이가 작은 애기 동백(?)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적 있다. 오랜 고립과 망각, 숱한 고난과 상처 속에서도 흠결 없는 푸른 잎들 속에서 붉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어느 밭둑가의 키 작은 동백나무 한 그루. 거기서 난 순간적으로 남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깊은 슬픔과 동시에 강인한 삶의 의지를 훔쳐보았을지 모른다.

임동확
1959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졸(석사).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운주사 가는 길』『벽을 문으로』『처음 사랑을 느꼈다』『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시화집『내 애인은 왼손잡이,』
5·18 20주년 기념 시선집『꿈, 어떤 맑은 날』
산문집 『들키고 싶은 비밀』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등을 펴냈다.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겸임)로 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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