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광풍속에서
월드컵의 광풍속에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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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밝아오니]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월드컵과 더불어 본격적인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대략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지속되는 올해의 장마철에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이 월드컵의 열기에 들떠 붉은 티셔츠를 입고 떼지어 목청껏 고함을 질러대는 광란의 밤을 보낼 것 같다.

양식을 가진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집단적 광기와 상업화된 애국주의에 냉소를 보내면서 심리적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텔레비전의 상업주의적이고 선정적인 월드컵 보도에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월드컵도 좋지만 6·15 기념행사나 김대중 전대통령의 북한 방문,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 등의 주요 현안이 뉴스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나는 성격도 소극적이고 나이도 나이인지라 붉은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나 운동장으로 몰려드는 붉은 악마 대열에는 아예 낄 생각을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경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열광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2002년 월드컵 때와는 달리 거리 응원 자체가 너무도 상업화된 것도 비위에 거슬린다.

그런데, 문제는 월드컵 축구의 열광과 재미 자체까지 거부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월드컵으로 도배를 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이 얄밉기는 하지만 한국 팀의 경기나 관심이 가는 다른 나라 팀의 경기를 보고 흥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만큼 축구라는 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계층과 성별, 나이를 넘어서는 대중적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가 처음부터 대중적인 서민 스포츠는 아니었다. 다 알다시피 19세기 중반까지 축구는 영국의 사립 중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즐기던 귀족 스포츠였다. 그러다가 공장노동자들로 하여금 건전한 여가생활을 즐기면서 단결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축구가 장려되면서 19세기 말에는 어느덧 서민 스포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귀족 스포츠였던 권투나 테니스가 대중 스포츠로 바뀐 것과 비슷한 시기에 축구 역시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로 탈바꿈한 셈이다.

한편 축구는 억압된 공격성의 배출구 역할도 했는데, 열광적 응원문화의 산물인 경기장 폭력과 이른바 홀리건의 역사는 축구의 대중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번에 월드컵이 열리는 독일에서도 19세기 말에는 경기장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했는데, 당시의 신문 기사는 1894년과 95년 축구 시즌인 6개월 동안 사망 20명, 중상 수백명이 보고되었으나 이는 실제 사상자의 10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대중적 열광과 흥분, 집단폭력과 조장된 애국심은 축구의 부정적인 측면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이것이 바로 축구의 근원적인 매력인지도 모른다. 서민 대중은 고달픈 현실을 떠나 도취하고 탐닉할 수 있는 대상을 갈망하고 있고, 축구는 이를 채워줄 수 있는 훌륭한 메카니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경기 방식과 팀웍이 중시되는 집단성, 태클과 몸싸움이 경기의 일부인 폭력성, 그리고 공과 빈 터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고, 가난한 중남미 국가나 아프리카 국가들도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축구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장마철에 연일 계속해서 비가 많이 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듯이, 월드컵 기간 중에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축구에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다만 축구 얘기를 하되 6·15와 남북교류에 도움이 되는 기사나 뉴스를 좀더 많이 다루어주었으면 좋겠다. 가령 1966년 월드 컵에서 북한 축구 팀이 보여준 눈부신 활약상이나 '천리마 축구단'이라는 북한의 다큐멘타리 영화 소개, 남북 축구교류에 관한 기사 등 시의에 맞는 축구 기사를 통해 월드 컵 축구 열풍에 들뜬 시청자나 독자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통일문제로 연결시킬 수는 없을까. 독자나 시청자의 집단적인 요구와 관심이 언론의 보도 방향을 변화시키고 유도할 수는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굴려본다.

/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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