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승에게 고개 숙인 귀족들
수도승에게 고개 숙인 귀족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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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달콤함, 권력에 비굴함/ 그림이야기/ 쟝 레옹 제롬의 '숨은 실력자' (1874 살롱전 출품작)//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 쓴 글이라 해도 난 6줄 안에 그 사람을 목매달 구실을 찾을 수 있다" 권력이란 것이 주는 힘은 이런 것 아닐까요? 물론 그만큼 법률해석이란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란 뜻도 되지만 목을 매달 만큼의 구실을 단 6줄 안에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어지간한 권세가 아니면 꿈도 꾸기 힘든 일이겠지요. 말 한 마디만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목이 달아날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 지금도 남자들은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이 어떤 집단에서건 그 정도는 되는 인물임을 과시하고 싶어하지요. '아, 그 사람 내가 살려줬지. 지가 나 아니었음 그 자리 붙어있나' 라는 말, 살면서 같이 사는 남자건 옆집 남자건, 아무튼 어색하지 않게 들어왔을 겁니다. 아무 관심없이 그저 책에만 한눈 판 채 감각에 의존해 계단을 내려오는 수도승에게 화려한 옷차림의 귀족들이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인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그림 제목은 보다시피 '숨은 실력자'입니다. 그렇다면 저 수도승이 왕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하는 그 '숨은 실력자'란 말일까요? 그렇게 상상하고 봐도 대충 이해가 가는 장면이긴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수도승은, 그 왕보다, 혹은 왕만큼 힘을 과시하는 한 존재의 자문역 정도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숨은 실력자의 파워가 더더욱 실감납니다. 본인도 아니구, 겨우 자문 정도나 하는-물론 그 자문 역할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시어머니 곁에 앉아 있는 시누 얼굴 떠올려보면 알겠지만 말입니다-수도승한테도 저 정도인걸 보면 말입니다. 저 수도승은 프랑스 루이 13세 시대의 막강 파워를 자랑하던 리쉴리에(1585-1642)라는 재상을 모시던 사람입니다. 6줄 안에 목숨 가르는 말 찾아내겠다는 사람은 바로 그 리쉴리에라는 사람이 한 말이구요 추기경 출신으로, 루이 13 세의 왕권 확립에 핵심이 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수도승은 등에 리쉴리에라는 막강한 숨은 실력자를 업고 있는 인물인 셈이죠. 우습죠? 그러나 현실이 이러한 것은 청와대 청소부 사기 사건만 떠올려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사람들이 그가 청소부인 것은 몰랐다 하더라도, 그저 청와대와 연결만 되어 있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지요. 그림을 그린 제롬은 프랑스의 보수적인 미술학교 에콜 드 보자르의 교수였습니다. 로코코 적인 것, 바로크 적인 것 등 다소 과장된 화풍은 꿈도 못 꿀만큼 아주 정석대로 그리기를 강요하던 학교였습니다. 자 아무튼 우스꽝스런 귀족들은 수도승이 계단을 다 내려가는 순간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 고개 잔뜩 숙이고 빌빌거려준 대가는 그 계단 위로 난 커다란 연회장에서 실컷 퍼먹고 거들먹거릴 수 있는 역시나 찰나적인 부스러기 권력이었겠지요. 생각하면 모른 척하고 책을 읽는 수도승이나, 고개 조아린 귀족들이나 다를 바는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모두 절대적인 어떤 권력 앞에 기생하는 서글픈 존재들이었을 뿐이고, 그 부분만큼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도 또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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