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노마디즘과 불임사회의 청산
진정한 노마디즘과 불임사회의 청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5.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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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구(시인, 문학평론가)
최근 우리 사회에 크게 회자된 말 가운데 노마디즘(nomadism)'을 빼놓을 수 없다. 유목주의로 번역되는 이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전파의 사도로 나선 감이 있다. 노마디즘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간편한 천막만을 둘둘 말아 낯선 땅으로 떠나는 초원지대 양치기의 삶을 모델로 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이의 실현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즉 진정한 노마디즘이 실현되려면, 기존의 상하의 구별을 토대로 한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연결 관계로 탈바꿈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 백인과 유색인, 선진국과 후진국, 사무직과 생산직 등의 관계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노마디즘의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기득권층이 낡고 딱딱하게 굳어진 자리를 버릴 때 수평의 연대, 즉 리좀(rhizome; 땅속 줄기)적 체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노마디즘의 씨앗은 넓게 퍼져 가고 있는 분위기이다. 고정직보다 계약직이 크게 늘어나고, 정년 보장보다 구조 조정을 통하여 조직을 일신시키고 채산성을 높여가려는 움직임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경우에는 기득권층은 안락한 가죽의자를 좀처럼 떠나는 법이 없으며, 꼬리부터 먼저 잘라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직장에서는 불과 입사 5년 남짓 된 대리급부터 명예 퇴직을 신청받는 등의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초원의 유목민들은 절대로 하층민들이 천막을 먼저 걷지 않는다. 수령부터 먼저 자신의 안락한 터전을 과감하게 버리고 일어서면, 수하의 사람들은 그를 따라 제 집을 버린다. 징기스칸이 불과 100만의 인구로 그 몇백 배에 달하는 인구와 넓은 땅을 가진 중국과 유럽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저력은, 그렇듯 기득권을 미련없이 버리는 체질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징기스칸은 인류 최초로 우편제도를 통해 광활한 영토를 연결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점령지에서도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통합의 힘을 얻어냈다고도 한다.

우리 사회가 통합의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친일파들의 미청산, 오랜 군사 독재의 그늘에서 기생한 기득권층들이 양보의 나눔의 미학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중뿔이 난 것처럼 곳곳이 터져 안정을 찾을 줄 모르는 부동산 문제도 결국 정책 입안자들부터가 투명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다.

그러다 보니 애늙은이가 되어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은 새 일자리를 좀처럼 찾기 어렵고, 사상 최고의 수출 호조 속에서도 청년 실업은 가히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모름지기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부자가 된 기업인들은, 새로운 투자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어떤 일을 하든지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어야 젊은이들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게 된다.

수없이 널린 일자리를 팽개친 채 말단 공무원 시험이 몇백대 일을 이루는 사회, 로또복권이 최대의 희망인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그 곪은 자리에 불법 취업 외국인들이 들어와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방치할 때 우리도 머잖아 결국 프랑스처럼 이주 외국인들이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사태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이것을 해결하는 첩경은 가진 자들이 틈을 만들어 떠날 줄 알고, 기왕의 축적을 투명하게 재투자해 소외된 사람들이 깃들 자리를 마련하고 생산 의욕을 북돋우는 것이다. 또한 위정자들도 국민의 여망을 등진 채 자신들만의 자리다툼, 밥그릇 챙기는 데 급급하지 말고 언제든지 빈 손으로 낯선 땅에 설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민심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그것이 곧 불임 사회를 청산하는 길이며, 진정한 노마디즘에 이르는 도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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