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가 면죄부인가
공소시효가 면죄부인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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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대한민국] 임종수 자유기고가

   
1975년 4월 9일, 8명의 정치범들이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전격 처형됐다.

형이 확정된 지 불과 2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초유의 사태를 두고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1974년 유신독재 반대운동이 거세지던 무렵, 중앙정보부는 좌파 혁신계 인사들이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고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관계자 23명 가운데 8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바로 다음날 형이 집행됐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 통치기의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인혁당 사건’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직권조사를 통해 이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아직 없다.

얼마 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위원회가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고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를 빼앗아 [부산문화방송]과 [한국문화방송], [부산일보]의 지분을 5·16 장학회로 넘겼다고 밝혔다.

부일장학회는 5·16 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변신한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후손과 옛 측근들이 지배해 왔다. 이 사건은 독재 권력의 언론장악 음모에서 비롯된 일이며, 권력자가 개인 기업을 공갈과 협박으로 강탈한 사악한 범죄이다.
국가기관의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찬반논란이 뜨겁다. 한나라당은 법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헌적 발상'이라고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지난 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이 추진될 당시에도 공소시효 문제를 내세우며 반대목소리를 높였고, 안기부 도청사건과 관련하여 특검법에 공개조항을 포함시켜 야4당 합의로 발의까지 해놓고도 새삼 위헌소지를 법사위에서 걸러내겠다는 저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시효배제 입법에 관한 반발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위헌시비 운운하고 있지만 결국 과거사 청산을 하지말자는 수작이다.

프랑스에서는 1964년 과거 나치시대의 범죄에 대해 ‘반인륜적 범죄’라는 새로운 범죄개념을 도입하고 공소시효를 배제했고, 독일은 1979년 모살죄(계획살인)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 나치의 학살범죄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1968년 유엔총회에서는 ‘전쟁범죄와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한 시효부적용에 관한 협약’을 체결,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아예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했다. 이처럼 고문, 대량살인 등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그 시효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 국제사회의 대세이다.

우리가 해방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신대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일제의 범죄행위에 대해 시효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작 과거 군사정권에 의해 자행된 고문과 학살, 강탈 등 범죄행위에 대해서만 법적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이 위헌운운하면서 역사청산을 거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들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덮고 가려는 단말마적인 몸부림이다. 절박한 심정은 이해되지만, 역사청산에 대한 뜨거운 국민적 열망을 어찌 얄팍한 법조문 따위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임종수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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