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정지아
  • 승인 2005.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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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오늘]정지아 소설가
몇 년 전 고등학교 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창의적 교육을 표방한 그 학교는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5명도 되지 않는, 이를 테면 최적의 교육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교사에게는 각자의 사무실이 주어졌고, 학생들이 매 시간 교사의 사무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들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내 방을 찾아왔다. 나를 좋아해서 자발적으로 온 줄 알고 내심 흐뭇했는데, 전혀 기꺼운 표정이 아니었다. 학교 측의 요구에 따라 학생회에서 각 선생의 방마다 학생들을 배정했던 것이다. 오래 묵은 짜증이 치밀어서 화를 냈다. 학생은 당연히 선생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위에서 시킨다고 무조건 따르는 노예근성을 버리라고. 의아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나를 보던 학생이 물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반항을 하라는 건가요?”

윗사람과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는 반항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생 시절 나는 반항아였다. 커트머리가 더 간편하고 좋은데 왜 모든 학생이 머리를 귀밑 2센티미터로 잘라야 하느냐, 혼자 공부하는 게 더 능률적인데 왜 모두 야간자습을 해야 하느냐, 눈이 좋지 않은데 왜 꼭 키 순서대로 자리를 앉아야 하느냐고 번번이 따져 묻는 나에게 선생들은 말했다.

“시키면 시킨 대로 할 것이지 뭔 잔말이 그렇게 많아!”

이것이 최근까지, 어쩌면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정서다. 시쳇말로 하면 ‘까라면 까야’하는 것이다. 다리가 침대보다 길면 잘리고, 짧으면 늘림을 당하는, 저 그리스 신화 속 괴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지배하는 세상.

산에 오른 자는 그 거대한 산의 티끌만한 부분이 되어 걸어야만 한다. 걷는 데 열중하다 보면 어디선가 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꽃잎이 바람에 살랑인다. 산에 올라본 사람들은 안다. 인간이라고 해서 꽃보다 나무보다 새보다 더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산에서는 인간도 한낱 미물과 소통하고 자신 역시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음을 겸허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미물과 소통하며 인내하며 걷는 자만이 정상에 오른다. 그 과정을 제대로 겪은 자는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본다고 해도 절대 교만할 수 없다. 내가 딛고 온 한 걸음, 한 걸음, 그 순간의 바람과 숲, 땀을 식혀주던 시원한 바람, 속세의 시름을 덜어주던 청량한 새의 울음소리,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도 그렇지 않으랴. 누군가는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고, 또 누군가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누군가는 경사 급한 초입에서 한숨을 내쉰다. 민주주의란 설령 정상에 오른 자라고 해도, 그 기쁨을 넘치게 아는 자라고 해도, 계곡에서 쉬는 자의 기쁨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초입에서 포기하려는 자의 코를 꿰어 끌고 가지 않는 것이다. 산이 좋은 것은 정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숲의 여기저기에 자잘한 아름다움과 기쁨들이 널려 있고, 사람들은 제각기 숲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주로 찾는 등산로가 뚫리는 것, 역사란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동네 뒷산을 오르다 생각해본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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