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칼럼]낮게 소박하게
[정지아칼럼]낮게 소박하게
  • 정지아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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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오늘]
   
얼마 전 전철을 탔는데 내 또래 여자 둘이 옆에 앉았다. ‘아줌마’답게 수다가 여간 아니어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사생활을 엿듣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무슨 테스트를 받은 모양인데 외향성 만점이 나왔다며 한 어머니의 자랑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친구인 듯한 여자는 자기 아들이 내성적이라 학교에서 말도 못하고 발표도 못한다며 웅변학원이라도 보내야 할 모양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나는 우리 사회가 무슨 일에든 앞장서고 제 의견 반듯하게 잘 밝히고 두루두루 친구 잘 사귀는 사람들만 대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이 그러니 어떻게든 활달한 외향성의 아이로 만들고 싶은 부모마음이야 백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너도나도 나서기 좋아하고, 저 하고 싶은 말 똑부러지게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생각하니, 나는 좀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한다. 주목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보잘것없는 누구든 자기만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단 하나밖에 없는 양 몰아가는 세상분위기에 있다. 무대에서는 스포트라이트가 한두 명의 주연에게만 집중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무대와 다르다.

삶의 무게는 주연이나 조연, 혹은 보이지 않는 무대 뒤의 스탭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삶의 기쁨이나 슬픔도 제각각 다른 순간에 모두에게 찾아온다.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좋으면 환호성을 지르고, 어떤 이는 아무리 좋아도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조금만 아파도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아파도 죽을지언정 비명 따위를 지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른 삶의 방식을 놓고 어찌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다만 다를 뿐이다. 산에 가면 하늘을 찌를 듯 장엄한 나무도 있고, 키를 낮춰 그 아래 깃들어 사는 나무도 있으며, 또 땅바닥에 붙어 몇 줌의 햇살을 받고 어여쁘게 피어나는 꽃도 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두드러진 것들보다 소박한 것들이 좋다. 봄의 첫 햇살에 고고하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도 좋지만 그보다는 냇가에 흐드러진, 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버들강아지가 더 좋다. 화려하지 않지만 겨울을 닮은 듯 잿빛의 솜털은, 햇살이 비칠 때, 저 누추한 것에도 봄은 오는가 싶게, 볼품없는 제 몸을 털어 빛을 튕겨낸다. 버들강아지들이 솜털을 살랑일 때, 나는 비로소 봄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세상에는 저 버들강아지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자본의 노예가 되어 무한속도로 질주하는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세상이 요구하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이 쓸쓸해질 때마다 나는 박용래의 시를 읽는다.

모과나무, 구름/ 소금항아리/ 삽살개/ 개비름/ 주인은 부재/ 손만이 기다리는 시간/ 흐르는 그늘/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족과 같이 어울려 있다.

보잘것없는 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으로 피어난 시를 읽으며, 그제야 마음이 넉넉해진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인생이란, 사람살이란 이런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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