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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쨌든, 발단은 웃음에서 비롯되었다. 경건하고 엄숙해야할 장소에서 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명박 사태’의 본질이다. 그가, 여태 ‘그날’의 피냄새를 지우지 않고 있는 보수우익정당의 유력한 대권주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태’는 그런대로 즐겁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빼면 어떻게 될까. 5·18유영봉안소에서 이명박이 아닌 익명의 누군가가 파안대소를 했다면, 과연 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정당한지 묻고 싶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5·18유영봉안소에서는 웃음이 금지되어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몇 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소위 386 정치인들이 5·18 하루 전날 술을 먹었다고 해서 혼난 일이다. 포장마차였다면 용서할 수 있었는데 도우미 딸린 단란주점이어서 사태가 커졌다는 ‘해설’이 곁들여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발단은 술에서 비롯되었다.
그 때도 역시 5·18 하루 전날 술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린 사람들은 없었다. 하필이면 단란주점이더냐, 운운하며 절묘하게 386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이명박과 386은 동일한 구조의 돌팔매질에 ‘혹 떼러 왔다가 혹하나 더 붙이고 간’ 정치인들이 되어 버렸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오래전 유럽의 어느 수도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호르헤라는 한 수도사가 ‘웃음’에 관한 책에 접근하는 젊은 수도사들을 모두 죽여 버린 사건이다. 신 앞에서의 경건을 그야말로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그 늙은 수도사에게 ‘웃음’은 죄악이었던 것이다.
호르헤와 맞섰던 이는 윌리엄 수도사였다. 윌리엄은 경건/웃음, 신/인간, 권위/탈권위 등의 관계를 ‘대립’으로 보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는 ‘보완’의 관계로 설명했다.
살인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끝내 그 수도원은 불타버렸다. 자신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권위화하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의 구조를 미로처럼 만들어, 외부인들의 접근을 차단해 버린 호르헤의 기획 탓에 처음의 불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진화가 불가능해서였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이름] 이야기다.
광주를 규정하고 상징하는 언어는 무엇보다도 5·18이다. 에코의 소설을 본뜬다면, 광주는 5·18이라는 벽돌로 지어진 수도원이다. 386과 이명박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공행상에 앞서 이런 질문을 먼저 해보고 싶다. 광주가 그들에게 해야 할 역할은 호르헤인가, 윌리엄인가. 5·18수도원으로서 광주의 기획은 열림이어야 하는가, 닫힘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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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찡찡짜는 것만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위해 웃고떠들것을 권장하기도한다.
그래서 명박이가 잘했다고. 물론 아니다.
나는 이 기사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명박이가 웃었다고 뭐시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80년 5월의 죽음을 가슴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괜히 그런척 하려다보니 겉으로나마 징징 짜야 한다고 우기는 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기사에 동조한다.
하지만 하나 고려하지 않은 것이 있다.
명박이는 왜 거기에 갔나.
그래도 민주화운동으로 국가 공인도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죽었는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려고?
그가 왜 혼자도 아니고 똘마니들을 몽땅 끌고 거기를 찾아갔는 지는
그의 웃음이 보여주고 있다.
영령들 조차 이용해 먹으려는 그의 마음이 보이기에 부아가 치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