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역사와 ‘박영발 비트’
지워진 역사와 ‘박영발 비트’
  • 최정기
  • 승인 200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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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과 상처 치료하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들어야"
   
최근 ‘시민의 소리’에서는 박영발 비트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런데 박영발은 누구이고, 비트는 또 무엇인가? 아마도 대부분의 일반인에게는 기사의 핵심을 이루는 박영발이라는 이름과 비트라는 명칭이 모두 낯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세기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이름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었다.

박영발은 한국전쟁기간 동안에 조선노동당 전라남도당 위원장이었다. 공산주의 정당에서는, 일반 정당의 도당위원장과는 달리, 도당위원장이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즉 좌와 우, 혹은 진보와 보수 및 수구로 나누어진 당시 전남지역의 생활세계에서 그는 적어도 한 쪽의 최고 권력자였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빨치산운동이 강했던 전남지역의 도당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갖는 힘은 여느 도당위원장보다 훨씬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그의 흔적은 화순에 있는 백아산에 가면 찾을 수 있다.

그곳에는 도당이 있었던 마을 등 한국전쟁 당시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에 박영발 위원장이 살았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비트는 비합법운동을 전개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은신처 및 근거지로 활용하는 공간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비트’라는 명칭은 한국전쟁기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통용되던 단어였다.

특히 지리산을 위시하여 화순 백아산, 화학산, 담양 가막골, 장흥 유치의 국사봉, 광양 백운산, 영광 불갑산 등의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매일매일 비트라는 말을 듣고 살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명칭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 시대를 살았던 일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것도 망각된 채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가? 아름답고 고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피눈물과 살덩이가 묻어있는 역사를 기억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혹시 기억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과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가?

우리는 독일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을 알고 있다. 유태인들이 2차대전 동안에 자신들이 당한 야만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침략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나아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그것들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고 과거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역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틀을 결정하고 있는 것들은 대체로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분단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의 법률체계, 경제구조, 교육체계 등은 물론이고 한 가문의 흥망성쇠나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

더 나아가 당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한과 눈물, 그 과정에서 달라진 인생 족적들,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되는 말, 좋고 나쁨의 기준 등이 대부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애써 고개를 돌렸었다. 물론 이러한 행동 역시 그 시기에 만들어진 행동기준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21세기이다. 그러한 사회구조나 행동양식이 우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제는 그로 인해 발생한 피눈물과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들어야 한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갈등의 역사를 무작정 회피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를 악화시키고, 문제해결을 지연시킬 뿐이다. 오히려 분단의 역사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역사적인 통찰을 시도해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의 소리’가 ‘박영발 비트’를 발굴한 것은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벗어던지고, 한국전쟁의 시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착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근대 이후 형성되어 한국전쟁으로 비화된 사회세력간의 갈등과 분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구성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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