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몽구칼럼]카니발 정신과 대안 언론의 함수 관계
[박몽구칼럼]카니발 정신과 대안 언론의 함수 관계
  • 시민의소리
  • 승인 2004.12.1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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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학박사

러시아의 세계적인 문학 이론가인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 1895~1975)이 정립한 이론 가운데 ‘카니발 이론’이 있다. 카니발은 흔히 사육제라고 번역되는 데서 볼 수 있듯, 중세 시대에 왕과 귀족들은 물론 농노 등 하층민들이 한데 어울려 갖는 축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카니발 기간에는 술과 음식을 앞에 놓고 춤추는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의 민중들은 가면 속에서 귀족들과 하나가 되어, 농담과 풍자의 언어로 상층민들의 전횡과 부패를 뜨겁게 꼬집었던 것이다. 중세의 하층민들은 가면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비판의 칼날을 높이는 한편 낡은 체제를 뒤엎고 바른 세상을 열기 위한 힘을 집결을 도모했던 것이다.

바흐찐이 발견한 메스는 중세의 카니발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카니발의 공간은 여전히 생명력을 불태우고 있다. 특권적인 지배 권력의 말만을 싣는 기존의 언론을 통해 제 목소리를 낼 길이 없는 민중들이 익명으로 발표하는 대자보며, 대안 언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인터넷 신문, 만화 등이 그 생생한 예이다.

IMF 이후 이른바 배운 사람들을 못 믿는 현상이 팽배하면서, 민초들 스스로 세태를 진단하고 바른 삶을 모색해 가려는 움직임이 거세어지면서 이런 대안 매체들은 더욱 터를 넓혀 가는 느낌이다.

다 알다시피 참여정부의 출범에도 민초들의 꿈과 역동적인 힘이 살아 숨쉬는 카니발 공간이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조중동’이라는 별칭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보수언론의 아성에 대항하여 그야말로 허약하게만 보였던 대안 언론이 거둔 대첩은 청사에 길이 기록될 만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대안 언론의 날개가 크게 꺾이는 사태들이 잇따르고 있어 우리들을 안타깝게 한다. 인터넷 신문의 운영자들이 심심찮게 권력의 끄나풀을 잡으려다가 들통이 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예는 빙산의 일각이다. 모 인터넷 언론의 시민 기자는 자신을 가공의 인물로 만들어 취재하여 보도하였다가 문제가 된 적도 있다.

하지만 더욱 문제인 것인 대안 언론에 실리는 기사에 대한 사회의 토론 방식이다. 대안 언론들은 고정된 기자나 필자만이 아니라 ‘리플’을 다는 등의 방식으로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 기사가 실릴 때마다, 이들 리플란에 심한 욕설과 즉물적인 비방만이 난무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이다.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오가는 공방을 보면 지극히 동물적이고 폭압적인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카니발의 공간은 기존의 매체로는 수용되기 어려운 민초들의 비원을 수용하고, 또 민초들의 염원을 모아 새 세상을 준비하는 장소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분명한 논리를 갖고 상대에게 어필해야 한다. 비논리의 극치는 야당의 한 의원이 속칭 386 세대와 인터넷 매체들을 가리켜 기생충이라고 내뱉은 극치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민초들은 여기에 욕설을 앞세우고 속으로 주먹을 먼저 내민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같은 비이성과 반동의 언어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은 순발력이 좋은 욕이 아니라, 내심을 눙친 익살과 치밀한 논리의 장만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같은 장치가 부재할 때 카니발 공간은 협소해지고 숨이 막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5?18 정신이 크게 날개를 얻지 못하고 있는 데도 이 같은 논리의 부족이 한 원인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새벽은 멀어 보이지만, 꾸준히 변혁과 설득의 논리를 마련해 가면서 꼬박 밤을 새는 사람에게만 여명은 밝는 법이다.

/박 몽 구 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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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 2004-12-11 20:13:34
    .
    대안언론이 초기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까닭은
    기자들의 수준이 기존의 (기득권?) 언론에서 훈련한 기자들 수준보다
    전혀 형편없이 떨어지는 실력(비판적 분석력과 종합적 사고력)이라서
    그 출발 초기부터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한 때문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외부 기고자들의 칼럼 형태로 질적 수준을 보완하려고
    시도하게 마련인데, 바로 여기서 각 대안언론 매체의 칼라 및 한계가
    설정되는 형국이더군요. 이 시민의 소리 대안언론도 마찬가지이고요.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
    를 역으로 추적해보니, 이 신문의 설립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현재 청
    와대 핵심부에 포진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가 있었더군요. 그래서
    이 신문은 - 이 신문으로 예를 들자면 - 신문의 사설(社說)이 없다는
    이상한(다른 신문들의 관행과는 다른) 특색조차 띠게 되니, 아무래도
    독자들의 수준 또한 애매모호 어리둥절한 부류들만 남게 되어 결국은
    제대로 팔리지 않는 신문이 되는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살아있는 현재 진행형 권력에 대해 비판의 기능을 포기한다는 얘기는
    결국 언론의 기본 존재의미를 포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셔야 할 것같네요.

    그래서, 이런 가시거리 한계를 갖는 신문을 통해서 외부 관광객 같은
    방문자들은, 왜 5.18 정신이 전국적인 국민정신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광주 전남에 머무르는 "지역정서"수준으로 뭉개지고 있어왔는가 하는
    원인을 보게 되는 거죠. 이 지역 사람들의 상당수 보통사람들의 리플
    행태를 보면서, 타지역 외부관점에 대한 배타적인 증오심이 이글대는
    한 5.18 정신은 소백산맥을 넘지 못하고 전국적인 정신으로 승화되지
    못할 수밖에 없겠다는 걸 발견하는 거지요.

    그 배타적 증오심의 최정상에는, 광주학살의 원흉과 주범이 전두환이
    아니라 주한미군과 그 뒤에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라고 화살을 돌리는
    24년 묵은 굴절된 세계관으로 현시되는, 일그러진 지역감정과 논리를
    꽃피워온 증언들이 있다는 거죠. 외부 사람들은 그게 무서운 거죠...

    그 화풀이 + 한풀이의 정치문화를 극복하지 못하면 광주 5.18 정신은
    영원히 광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