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칼럼]유명(有名)과 무명(無名)
[정지아 칼럼]유명(有名)과 무명(無名)
  • 정지아
  • 승인 2004.11.25 00:00
  • 댓글 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정지아

얼마 전 사십 대 중반에 접어든 선배를 만났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소주 몇 잔에 취한 선배는 그를 알고 지낸 지 근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니 자기만 뒤쳐져 있더라는 것이다. 감옥행까지는 아니었어도 시대를 져버릴 수 없어 아픈 청춘의 시절을 보냈던 선배는 사회과학 출판사에 취직한 이후 지금까지 출판업계에서 밥을 먹고 있다.

내가 알건대 그는 앞장 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어떤 이들보다 자신의 삶에서 젊은 날의 이상을 실천하려 했던, 몇 안 되게 반듯한 사람이다.그는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집 한 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기왕이면 번잡하지 않고 공기 맑은 강북 저 끝 산자락에 25평짜리 작은 아파트 한 채 장만한 것으로도 이사철마다 전세비 걱정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 앞에서 죄스러워 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비슷한 값을 주고 강남으로 진출했던 사람들이 십여 년 사이 놀랍게 변했더라는 것이다.

이제 선배 능력으로 강남으로 입성한다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나 아내는 그런 아버지, 남편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은근히 무시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모임에 나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돈이나 명예보다 사람답게 똑바로 사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살아온 선배로서는 평생에 걸친 자신의 삶이 고작 무능력으로 낙인찍히는 현실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이름 없이 살아가는 필부(匹夫)들을 유명(有名)에 대한 집착을 떨친 도인으로 대접했다. 그리하여 유명씨들도 아무 가진 것 없는 무명씨들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든 이름이든 뭔가를 가지지 않은-대개 돈과 이름은 함께 가기 마련이지만- 무명씨들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돈과 이름을 어떻게 얻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으며, 무명씨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름과 돈을 얻기 위해 법대로 의대로 몰려들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생존경쟁의 지옥에서 승리하기 위해 피 묻은 칼 휘두르기도 서슴지 않는다.

사람다운 정리(情理)를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온 무명씨들은 그리하여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신의 삶을 쓸쓸히 반추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그래도 세상이 좀 좋아져서 유명씨들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도 많아졌다. 그러나 누구도 무명씨들의 실추된 명예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디 피 흘리는 혁명뿐이랴. 무명씨들이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세상도 바뀐다고 나는 믿는다. 옛날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은 당대의 권력자인 사마소가 혼담을 꺼내려하자 무려 60일 동안이나 술에 취해 곤드라져 있었다고 한다.

완적의 능력을 높이 사서 어떻게든 가까이 두려 했던 사마소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도 당당히 거부하고 스스로 가난 속으로 뛰어드는 당당한 무명씨들이 그립다.

그날 나는, 내가 잡아준 택시도 마다하고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전철역으로 향하는 선배의 쳐진 어깨를 쓸쓸히 바라볼 밖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 지 아 소설가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현 2005-04-04 13:42:25
    관광객님

    정지아님 소설 혹시 읽어보셨나요?
    지금은 판금된 서적인데...
    웃고 있는 저 모습이 훨씬 좋아요.
    님보다 훨씬 더 삶을 심각하게 살아오신 분이랍니다

    복개천 2004-11-28 16:03:33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고
    온화함 속에 폭풍우가 있다.
    정겹고 눈물나면서도 글을 읽으니 힘이 나고 의지가 솟구친다..좋은 글 읽게 해주신 시민의소리에 감사~ 정지아씨에게도 건필~~~

    관광객 2004-11-28 10:21:44
    .
    글의 주제는 심각한데
    글쓴이의 얼굴 사진은 함박웃음을 띄니 좀 읽는 이가 다 머쓱하네요..
    심각한 사진 하나 더 찍어서 이곳 신문사에 보내세요...
    심각한 글 나올 땐 심각한 얼굴 표정 곁들여 올리라고.. ^.^
    이참에 아주 그냥 여러 표정 사진 찍으셔서
    필름 통째로 갖다 주면 인터넷 관리자가 알아서 골라 올리게 .... ;))

    소유와 무소유를 비교하면 끝이 없지요?
    빌 게이츠 이전에 최고부자였던 미국의 록펠러에게 기자가 묻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은 우리가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는 게
    "적당한" 금액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랬더니 록펠러 대답인즉슨,
    "A Little More" 라고 했다지요.
    그 사람도 "조금만 더" 있었으면 했대요....

    남과 나를 비교(比較)하는 일이 불행의 시작이 되죠 ?

    대한민국이 가난한 나라인 것은
    외환보유고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끊임없이 서로 비교하면서 살아가기 때문.

    전라도가 가난한 동네인 것은
    기름진 평야와 수려한 강이 없어서가 아니라
    똥물이 된 낙동강이 가져다 준 돈과 자신을 비교해서 살기 때문.

    돈(똥)과 시(詩)를 바꾸고 싶어하는 때문.
    .

    체게바라 2004-11-27 16:48:52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디 피 흘리는 혁명뿐이랴. 무명씨들이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세상도 바뀐다고 나는 믿는다'가 맘에 와 닿는군요. 앞으로 좋은 글 부탁합니다.

    나목 2004-11-27 16:47:16
    정지아님 한폭의 따뜻한 그림 같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남한은 선배라는 분 처럼 살고 있는 범부들이 많아서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