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말 사잇길- '아그 데꼬 샐팍에넌 가지 말그라이'
전라도 말 사잇길- '아그 데꼬 샐팍에넌 가지 말그라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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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가 잘 써지지 않으면, 나는 산책을 한다. 산책이라고 하지만 동네 한바퀴 돌면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거나, 가까운 야산의 끄트머리를 다녀오거나 하는 정도이다. 밀린 원고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바깥바람을 만나러 나간다. 나는 먼저 구두를 신는다. 전라도 말로는 구쑤라고 한다. 그 다음 주머니에서 쇠때를 꺼낸다. 나는 쇠때를 가지고 현관문을 잠근다. 느리게 계단을 내려가서 대문을 나선다. 대문을 나서면 샐팍이다. 샐팍이라는 말을 떠올리자, 어린 시절 젖먹이 동생을 맡겨두고 일 나가던 어머니가 당부하던 말이 떠오른다. '아그 데꼬 샐팍에넌 가지 말그라이.' 말은 풍경을 수반한다. 전라도 말과 함께 산책을 한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단어 하나마다 추억이 떠오르고, 단어 하나마다 지난했던 어린 시절이 턱턱 걸린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온몸을 쪼아댄다. (따땃한 봄뱉이 사방디럴 쪼사댄다.)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솟아난, 민들레의 노란 꽃대에 하늘 한끝이 살랑거린다. (쎄맨 바닥얼 띠리고 솟아난, 머슴달레 누런 꽃대에 하늘 한끄터리가 살랑거린다.) 구석진 곳에는 쓰레기들이 모여있다. (핸비짝에넌 씨레기덜이 모태 있다.)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제일반점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는 맛이 좋다. (자판기 커피럴 마신다. 제일반점 앞에 있넌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넌 맛나다.) 동네를 한바퀴 돌까 하다가 산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동네럴 한바꾸 도까 허다가 까끔 짝으로 걸음얼 앵긴다.) 아파트 끝에는 산이 있고 무덤들이 즐비하다. (아빠또 끄터리에넌 까끔이 있고 묏뚱덜이 조이허니 있다.) 예전에는 죽은 사람들의 집보다 산 사람들의 집이 낮은 곳에 있었는데, (그전에넌 죽은 사람덜으 집보다 산 사람덜으 집이 야찬 디 있었는디,) 지금은 산 사람의 집이 더 높은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시방언 산 사람으 집이 채도 높은 디에 있넌 경우가 많다.) 높은 곳에 있는 집은 죽은 자의 집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프란 곳에 있넌 집언 죽은 자의 집 같다넌 생각이 든다.) 그렇지. 저렇게 돌집에 사는 것은, 무덤만도 못할 수 있지. (그라재. 조라고 독집에 사넌 것언, 묏뚱만도 못헐 수 있재.) 산자락에는 쓰레기로 밭둑을 만든 다랑치들이 있다. 장다리꽃이 피었다. (까끔자락에넌 씨레기로 밭뚝얼 맹근 다랑치덜이 있다. 무시꽃이 폈다.) 참판골 입구에서 뒤돌아 선다. 약수터까지는 내게 너무 멀다. (참판꼴 가넌디서 뒤돌아 선다. 시암까지넌 난테 너머 멀다.) 약수터에는 가지 못하고, 돌아서 온다. 가꾸지 않은 탱자나무가 전봇대 크기만큼 자라있다. 희고 부신 꽃. 설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저 탱자꽃처럼 가꾸지 않았어도 서럽도록 아름다운, 전라도 말을 떠올렸다. 내게 있어 전라도 말은, 추운 겨울 날 학교에 갔다와서, 곱은 손을 어머니 엉덩이 밑에 넣었을 때의 따스함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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