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칼럼]막걸리와 막사발
[김경수칼럼]막걸리와 막사발
  • 김경수
  • 승인 2004.06.24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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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문학박사, 전대사대부고 교사]
컬~컬하요. 퇴근길에 만나자는 구청 향토공부 벗의 전화다. 얼마 만인가. 옛길을 걸어서 이 골목 저 고샅을 탐사차원보단 그저 그렇게 저렇게 사는구먼 하면서 다다른 곳이 바로 오치 풍요길 막걸리집이다. 막내집이나 박서방집도 아니요, 뿌연 유리창문에 왕대포와 안주일체라는 페인트 글씨는 없었지만, 그냥 그대로의 어원을 따라 막걸리로 타는 목을 적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이었다.

먼저 아욱된장국이 나와 술맛을 돋군다. 이어 된장에 무친 메밀나물 한 젓가락 들고, 사기보세기 잔에다 노란 양은주전자에 담은 막걸리를 가득 따른다. 꿀떡 꿀떡 잘 넘어간다. 이 술이 지닌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이 함께 느껴지며 갈증이 멎는 것 같다. 농사일은 아니 했지만 땀 흘리며 일한 뒤 기분으로 청량감도 들었다. 금새 주위 빈자리가 채워지고, 모두 명강사가 되어 화음 속이다. 우리가 시킨 특별 주문안주인 쪽파가 곁들여진 홍어찜이 나오고 서너 잔이 넘어가니 일곡마을 집까지 걷는데 에너지로 발동된다.

며칠 전 김학민이 쓴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 >를 읽었다. 등산대장으로 하산할 때까지 갈증이 나도 절대 물을 마시지 못하도록 독재한 뒤, 막걸리의 참 맛을 느끼도록 했다는 대목에서 밑줄을 그었다. 십 수년 전 주말 연속강의 7시간을 한 뒤, 허기와 함께 다가오는 목마름을 풀어냈던 대포집이 생각났다. 안주도 없이, 아니 찾을 겨를도 없이 몇 사발 연거푸 고 나서 제정신이 들었다.

주모의 친절 배려로 푹 삭은 홍어무침을 입 속에 넣고 들이킨 막걸리는 환상의 감칠맛을 내면서 평온 속으로 빠져들어, 조금씩 기운이 솟아오르니 취기가 동했다. 헐레벌떡 올라탄 막차 전 시외버스 안은 빼곡하다. 천정 바람구멍 가까이의 손잡이를 겨우 찾아 움켜 잡고, 일상을 정리했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세상을 살았다고. 사실 어제같이 느껴지지만 교사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음료가 막걸리였다. 장동 안경할머니집을 비롯한 왕대포 명소가 우리 광주에는 많았다. 된장에 무친 고구마대 나물을 안주로 배불리 마시며 정을 나누었던 그 때 술벗은 인생의 동반자 같았다. 허풍을 보탠 군대생활 얘기부터 취루탄으로 범벅된 우리 현대사의 편찬장이 곧 막걸리집이었다.

시골이나 도회나 주조장은 대개 부자집이었으나, 막걸리 가게는 허름하고 소박했었다. 단골은 일단 고된 일을 한 사람과 지긋한 노객이었지만, 하이칼라나 대학생들도 섞여 우여 골절 생활사를 나누니 향토역사의 토론장소가 되기도 했다. 기쁨으로 가득한 소식이든 억울함과 한스러운 사연이든 정보의 최전선에는 포근함이 담겨있는 막걸리가 늘 함께 있었다.

막걸리에 어울리는 술잔으로는 막사발이 으뜸이었다. 그 옛적 흔해빠져 개밥그릇으로도 쓰였던 막사발은 투박하면서도 소담스러운 모양따라 서민의 대표적 생활도구였다. 이 그릇에 텁텁한 흰빛 막걸리는 적당한 양이 담겨 목 넘김에 부담이 없고, 들어올려 입에 댈 때까지 시간이 멈춘 듯이 가뿐한 느낌이었다.

영산포가 고향인 일본인 사호리(佐堀伸三)가 큰 매력을 가졌다며 경남 하동에서 구해온 막사발을 보여주면서 ‘막’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막 만든 것. 대충 구운 흔한 그릇으로 알기 십상이다. 막사발은 무기교가 아니라 완숙한 물레놀림과 굽깍기 터치가 배여 있고, 점토 선택에서 불 다스림까지 대한의 그릇에 대한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예술품이다.

한국의 생활풍속이 훤하게 담겨져 있으니 더 숨길 것도 없이 <그대로 그냥 > ‘막’자의 아름다움이다. 여기에 담긴 막걸리 역시 열 가지가 넘는 필수아미노산이 들어있고, 신진대사를 촉진한 성분까지 함유하니 막 건강하게 한 제일 웰빙식품 또는 영양음료수(주)로 선전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막사발에 채운 막걸리는 선조들의 슬기가 모아져 꽃핀 높은 문화상품이다. 광주가 맛의 고향이라는데 특산품으로 무등산수박과 차 정도다. 나아가 멋과 예술의 고장으로 알려졌으나, 막 내놓고 많이 팔 만한 상품도 드물다. 광주막사발 막걸리를 향토상품으로 띄어본다.

/김경수 문학박사. 전대사대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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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이름 2004-06-24 22:57:35
    정말 이 소리를 아십니다.
    정말 이 소리가 그립습니다.
    탁주라고고 불렸던 그 노란 주전자 속의 막걸리에는 아련한 추억들이 빡빡하게
    담겨져 있었지요
    없어져 버린 우리의 추억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린 아버지의 술 심바람,
    이것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이었는데......
    언제 만나 막걸리로 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그려.

    애주가 2004-06-24 18:39:20
    장마가 시작되어 하루종일 비가 촉촉히 내리는데
    이 무슨 유혹인가..
    막걸리 아 막걸리 추억의 술
    지금도 가끔 막걸리 한잔이면 온몸이 젖어드는데..
    정말 막사발의 막걸리같은 글이군요
    김경수 선생님 한잔 하고싶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