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공무원과 교사는 ‘홍길동’?
[특별기고] 공무원과 교사는 ‘홍길동’?
  • 시민의소리
  • 승인 2004.04.10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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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난실(광주시의회 의원)

홍길동은 호부호형을 금지당했다. ‘서자’라는 신분 탓이다. 잘못된 사회적 관습(또는 제도) 때문에 홍길동은 호부호형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홍길동’이 130만명이나 된다.

88만명에 달하는 공무원들과 40만명의 교사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대판 ‘홍길동’이다. 공무원법에는 “공무원은 선거에 있어서 특정정당 또는 특정인의 지지나 반대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고 못 박고 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공무원과 교사들은 ‘어느 정당이 좋다’는 의견조차 낼 수 없도록 해놓은 것이다. 홍길동이 호부호형을 금지당했듯이 공무원과 교사들은 정당에 대한 호불호 표현을 금지당하고 있다.

이는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적 인권의 본질적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어 위헌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공무원노조가 특정 정당지지 선언을 하자 정부는 체포와 구속 등 강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전교조 위원장이 홈페이지에 올린 특정 정당 지지글을 두고도 정부의 강경방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무원과 교사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할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부는 여전히 공무원과 교사가 자기 주장과 입장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것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부터다. 군사독재시절의 악법이 아직까지 공무원과 교사들의 기본권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또 공무원의 특정 정당 지지는 기본적인 의사 표시이지, 공무원의 직무수행에 있어서 중립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헌법에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보장된다’고 명시돼 있다.

공무원의 직무수행이 외부의 정치적 영향에 휘둘리지 않도록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헌법이 보장한 정치적 중립의 ‘권리’가 현실에서는 공무원이 정치적 의사도 표시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공무원의 기본적인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에는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영국에서는 직급별로 구분을 두어 하위직 공무원에게는 거의 모든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있다. 허가를 얻어야 하는 중간직 공무원들도 노조를 통한 정치활동만큼은 허가를 얻지 않아도 된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정치적 의사표시, 정당가입, 정치자금 기부는 보장받고 있다. 정치집회에서 연설과 같은 적극적인 정치활동만 금지시키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처럼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일본에서조차 정당가입이나 확성기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에서 단순 의사표시를 허용하고 있다.

공무원과 교사의 특정정당 지지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라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 자체가 매우 위헌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가 체포와 구속같은 강경대응으로 일관해서 끝날 일은 아니다.

당장 몇 명의 입을 막는다고 ‘위헌적인 현실’이 없는 일로 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잘못된 법률에 저항하는 불복종운동은 공익적 차원에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이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헌법에 보장된 공무원과 교사들의 기본적인 정치활동에 대해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윤난실(광주광역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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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 2004-04-12 17:35:43
    .

    현실적 제도적 구조적 부조리와 불합리가 사람의 기본 인권을 옭죄면
    그 모순의 구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서민층 필부필부들은
    걸죽한 육담이나 판소리나 소설 등의 형식을 빌어
    억울함과 설움을 표현해오는 게 동서고금의 공통된 표현 양식이지요.

    왜냐하면 인류 역사의 상당 부분이 절대왕권 제도하에서
    군대(무력) 동원력과 세금 징수권이라는 재정확보 강제력을 바탕으로
    상의하달식 질서유지 체제를 인정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설득논리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왕권은 하늘이 내리신 천부권이다, 라는 논리였죠.
    이를 위해 물론 종교의 힘이 가세되었고요.

    왕권에 대한 천부(天賦)설 내지 신탁(神託)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통령은 하늘이 내리신(예정한) 천자(天子)라고 하는 선입견이 되어
    그 모양과 단어를 바꾸어 한국인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유효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투표행위라는 절차적 민주주의 과정만
    통과할 뿐 아직도 그 심저에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천도교적 유산 때문인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은 곧 하늘이 내리신 사람이므로
    대통령을 탄핵한다는 것은 한울님의 뜻을 거역하는 신성모독 작태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탄핵반대 촛불 시위가 아주 자연스럽게
    많은 군중들의 심리 속에 전이되는 바탕이 되는 정서인 것을 봅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비교해서 들기가 참 민망스럽고 죄송하긴 합니다만
    미국은 230년 전 독립선언을 하면서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새로운 질서(New Order)를 가진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지칭하는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정치 질서의 출생 신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민주주의"라는 문자적 의미의 참다운 실현이
    구현되기 시작한 것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피살되고 나서도
    한 10 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회 전반에 걸쳐 인종 차별 질서가
    철회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것도 실천적으로는 불과 30년 정도의
    일천한 열매를 보이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미국은 짧은 역사를 거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 학습을 경험해온 -
    한국인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채식동물이 아니라 육식동물 같은 - 젊고
    혈기 왕성한 정력적인 나라입니다.

    아직도 그 시행착오가 여러 분야에서 되풀이 되고 있지만
    적어도 공무원과 교육기관 종사자의 정치적 중립의무의 전통은
    아주 확실하게 자리잡은 시행착오 학습의 열매가 되고 있습니다.

    공무원과 교육자의 정치활동 금지법은 5.16 쿠테타의 악법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을 만들어온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결론적으로 받아들여 적용하고 있는 규제의 질서법인 것입니다.

    그것은 공무원과 교육자의 영향력과 그 영향력의 범위가
    일반 자연인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하는,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의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공무원 및 교육자 개개인의 시민적 권리인 선거권 피선거권
    또는 투표권 내지 유권자로서의 권리가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정 범위가 설정되는 직무 공간에서의
    정치적 발언 및 그의 대외적 공개적 행동이 금지되는 것입니다.

    공무원 및 교육자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신분보호" 조항은
    예컨대 인사권자가 공화당 지지자인데 피인사권자 또는 입사 지원자인
    신규채용 피면접 대상자가 민주당 지지자인 것이 노출되었을 때 받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현실적으로 엄청나게 많이 빚어왔던
    그런 뼈아픈 경험들의 누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런 과정과 경험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리라고 짐작하는 것이
    당해 금지 규제 조항의 법리적 타당성을 제공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지역주의로 인한 피해와 불이익의 경험들이
    입사원서 등에 본적지를 기재하지 않도록 하게 된 금지 권고 규정을
    받아들이게 한 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지극히 정치적인 결정 사함임을
    아실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기재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도
    그런 것을 "묻지도 말아야 할" 의무와 함께
    다 같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공화당 지지 발언을 하는 것을
    학생과 학부모가 듣고 싶지 않아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민주당 출신 주지사가 공화당 지지 환경국장에게
    공화당 지지 리본을 차고 출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권리를 -
    그리고 환경국 산하 피감독 공해배출 업체들에게 환경국장이
    공화당 지지자임을 노출하지 말도록 해야 하는 주지사로서의 의무를 -
    법이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무원과 교육자 개인으로서 보면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만
    권리와 의무 관계는 전체로서의 국민적 형평성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자유와 권리가
    상대방의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아할 권리와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형평성의 원리 말입니다.

    다 큰 성인들 간의 거래관계야 물론 여러 상황을 계산할 줄 아는
    어른들끼리의 관계라서 백배 양보할 수 있다손치더라도
    학교의 교실에서 죄없이 앉아있는 50 명의 어린 학생들은
    세상물정 판단력도 아직 제대로 안갖추어진 여린 풀밭인데
    칠판 앞에서 선생님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내려주는 정치적 선호도 강의를
    받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이 현실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일방통행성의 문제도 아울러 고려하셔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은 이런 것을 정부가 강제해서 검찰권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상대로 한 법적 소송권으로 대처합니다.
    그래서 정치적 자유의 양면성을 함께 인정하는 법적 질서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한국에서 학부모가 학교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건다는 것이
    제반 상황 여건상 좀체로 가능하지 않은 교육환경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법집행 기관이 알아서 자진해서 먼저 집행하지 않으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대두될 수 있는 개연성이 상존하는 환경입니다.

    관련하여, 이러한 이슈가 어느 일방에서 보면
    공무원과 교육자의 정치행위 금지법이 위헌적이라 여겨져서
    위헌법률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는 게 타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하려 한다면
    그것을 현행 법규체계 하에서의 위헌법률 소청제도를 통해 하셔야지
    집단행동으로 머리에 빨간 띠 두르고 하실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겁니다.

    미국도 공무원 단위별 노조가 있습니다.
    그들도 정치적 찬반 의사표시를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방법이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특정 정책에 대해 - 선거 이슈가 되는 사안에 대해 -
    공화당과 민주당 양측 주장을 정책대비표 형태로 노조회보에 게재합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우리는 민노당을 지지한다"라고 발표하는 수준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반경입니다.

    직능 단위별 공무원 노조가 양측 정책 비교표를 노조 회보에 내면
    그 비교표는 누가 보더라도 어느 정당의 정책이 어느 노조에 유불리한가
    쉽게 식별될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노조 모임에서 각 작업장 대표들에게 "구두로" 설명합니다.
    "보시다 시피 우리 노조에서는 이번에 ooo 당을 찍는 게 유리합니다"라고.
    그것을 대외적으로 발표하거나 신문 등에다 기자회견을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노조의 의사표시가 있었다 해도 각 노조원들의 투표는 전혀 개인적
    개별적인 선택 사항이 되고 있고 말고요...

    이런 의미에서도 한국의 작금의 실태는 저으기 우려스러운 지경입니다.
    특별히 교육자 노조가 어느 정책이 아니라 어느 정당을 지지한다는
    포괄적인 백지 위임의 선언을 과감히 할 수 있는 "깡다구"가 다만
    어처구니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응해서 학생과 학무모들이 반론권 운동을 벌이지 않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잠잠한 것도
    자기 주장을 포기하는 우매한 반응양식이 되고 있어
    그것도 또한 우습습니다.

    따라서 이런 제반 사항들이 근대 민주주의의 효시 수출국인 미국의
    시행착오 학습에서 배운 사항들을 참고하고 연구하는 작업에서 논의되기
    시작해야지 이렇게 다짜고짜 불복종 운동부터 선창하는 전례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한국인들은 얼굴 붉히면 서로 멱살잡고 욕지거리를 하며
    싸움판을 벌이지만 - 이거 눈알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라면서 -
    교통사고가 나면 미국인들은 각각이 차량번호와 보험증 번호와 면허증을
    상호 정보교환하며 차분히 경찰이 와서 보고서를 쓸 때까지 기다립니다.

    미국인들은 탄핵사건을 국회와 법이 처리합니다만
    한국인들은 탄핵사건을 촛불시위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낙선운동이 가세가 됨을 봅니다.

    법은 실종되고 거리의 으쌰으쌰 물결만이 예찬됩니다.

    한국경찰은 발포권이 없는데
    미국경찰은 발포권이 있다는 것도
    질서유지의 능력과 권위가 차이가 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법이 존중받지 못하고 지내온 사회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법을 존중하지 않고 대통령이 법 위에서 놀아왔으니)
    거리 운동이 유일한 대안이긴 합니다만서도....

    어쨌거나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정치적 선호도를 가르치는 것은
    안 될 일이겠습니다.

    나라 사랑 방식은 노무현 방식만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지 부시 방식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사시옵사시소서!.
    시의원님 나으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