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단소리]자살과 무더운 8월
[쓴소리단소리]자살과 무더운 8월
  • 문병란
  • 승인 2003.08.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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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생각해 본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것. 이에 대하여 한 현철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인간은 자기의 감옥의 문을 두드릴 권리가 없는 수인이다.… 인간은 신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스스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소크라테스)」

이런 말을 남긴 당사자 자신도 아테네의 보수적 지도자나 궤변철학자들의 극심한 모함으로 독배형을 받아 스스로 약사발을 들이키고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극형의 일종으로 형리들의 명령에 의해 진리에 순교한 자기 죽음을 인식하고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까지 남기고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인 죽음이니까 위대한 죽음이라 일컫는다.

자해.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 사실은 '자살도 최악의 살인 행위로서, 후회할 생각의 기회조차 남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가 자기를 살해한 것이니까 그 죄를 물을 데가 없겠지만 그 남은 심문은 염라대왕의 몫으로 살인에 대한 질책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 자살을 '생전의 흉허물을 덮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택하여 뭇 세인들의 중구(衆口)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신은 좀더 높은 곳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며 그 현명과 우둔을 낱낱이 판별하기 때문에 결코 인생을 얼버무릴 수 없는 것이다. 설사 그 죄상에 대하여 인간의 판관은 기각한다 할지라도 신의 눈길은 계속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자살은 비극이자 개인적 사회적 큰 손실

「자살은 명예를 빛내기 위하여 할 일이지 해야 할 일을 회피하기 위한 수치스러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혼자만을 위하여 살거나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플루타크 영웅전)」

이 경구에 의하더라도 죽음은 스스로 택할 수 있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만인의 것이요, 모든 죽음은 결국 객관화 되는 것이다. 자기의 삶과 죽음까지도 자기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혹자 '자살은 세상에 대한 복수라고도 하지만, 그 복수는 까딱하면 비웃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철인이나 심리학자 도덕가들이 무어라 하든간에 망자는 우리와 이미 유명을 달리하여 우리들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는 이제 아무 말이 없다. 그의 침묵은 '자살은 더할나위 없는 겁쟁이의 결과'라고 폄하할지라도 욕된 세속적 삶을 거슬러 유유할지 모른다.

또, 문학 작품 속의 자살이나 멜로드라마 속의 자살은 로맨틱한 미학의 경지에 이르고 있어 사춘기의 문학병 속에선 유행을 탈수도 있고 모방범죄처럼 흉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자살은 허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극이며 개인적 사회적 큰 손실이다. 자기의 목숨을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크게는 우주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며 사회와 국가 모든 형제자매 이웃의 은혜를 배반하는 하나의 죄악인 것이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병리학적 현상의 하나로서 자살이 병처럼 번지고 있어 하루 36명의 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IMF이후 갑작스런 경제파국으로 인한 기업 총수들의 죽음, 설사 그것이 최대의 '자기항변'이나 '진실의 자백'으로서 책임감을 통감하고 만인 앞에 뜻이 담긴 결단의 표현일지라도 그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까지 어떤 큰 결실을 맺음만은 못하다. 결과적으로 인생에 대한 몰이해와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현대아산 이사회 정몽헌 의장의 자살은 더더욱 그러하다. 대북사업 강력 추진을 유서로 당부하고 자기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달라는 강한 집착을 보인 그 민족적 대사업의 시작단계에서 실행을 위한 투쟁을 접고 떠나버림은 너무 아쉬운 결단이 아닌가 싶다.

가뜩이나 흔들리는 재계, 정계, 어느때보다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한 이때 만난을 헤쳐 이룩한 선대인의 그 큰 뜻을 남과 북에 심어 통일 조국의 한 초석을 박기 위해서라도 좀더 지혜와 용기로써 민족통일의 장애요인과 싸웠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 큰 짐이 현대그룹 정씨 일가의 것만이 아닐진대 그 중차대한 짐을 너무 쉽게 벗어버린 것이 아닌가 통탄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한 의인의 죽음은 때로 만인의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반성과 결단을 가져오고 혼미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만약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오늘의 통일전선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다면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의인의 죽음 때론 만인의 삶 위해 필요

그가 유서에 남긴 어리석은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을 용서해 달라는 문구는 매우 함축적인 표현이다. 그의 선대인이 소떼를 몰고 휴전선 철책을 뚫고 북쪽의 고향으로 가던 그 장관을 마치 모세의 출애급 영광의 액소덕스를 보는 것보다 더 통쾌했다.

여러 난관에 봉착된 대북 사업, 통일정책의 불연속선을 보면서 그의 자살의 결단을 심정적으로 이해하지만, 5백마리의 소떼가 휴전선을 넘어가는 그 장관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 민족의 미래는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의 선대인과 더불어 북으로 북으로 그 소떼는 달려갈 것이다.

/문병란(시인·전 조선대교수·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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