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으로 눈빛으로 손짓으로 말해봐요
표정으로 눈빛으로 손짓으로 말해봐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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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아, 다음에는 수화로 인사하자"/ 환한 미소 고운이 보며 생각한다/ 서로의 눈 쳐다볼 겨를없어/ 껍데기뿐인 말 내뱉는 난/ '의사소통 장애인'인지 몰라// 수화배우며 잃었던 나를 찾아간다 제가 활동하는 봉사 모임에 고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 아이 얼굴만 보고 있어도 저는 너무 즐겁고 흐뭇합니다. 항상 맑고 밝은 얼굴표정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얼굴 자체가 이름이 됩니다. '이 맑음'이라는 이름표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수화는 손짓, 즉 손으로 말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수화의 생명은 손놀림이 아니라 얼굴표정입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절대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수화를 배울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응시하게되고 어느 순간에는 눈빛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가만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정이 드는 게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얼굴로, 눈빛으로, 손짓으로, 몸짓으로 의사표현까지 한다치면 어느 누구와도 금세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수화라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대단히 인간적인 의사소통수단입니다. 사람의 오감 가운데 청각을 제외한 시각, 촉각, 심지어 후각과 미각까지 동원하여 의사교환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수화를 배우다 보면 보다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습관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저는 형하고 단 둘이 서울 생활을 한 지 8년이 넘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단지 말을 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껍데기뿐인 대화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형제간의 정은 반비례했겠지요. 결국 형과 저는 비장애인이지만, 의사소통 장애인이나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청각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많은 것들을 소홀히 대하고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웃는 얼굴, 따뜻한 미소, 너그러운 마음보다는 무뚝뚝함, 냉소, 조급한 마음, 심지어 욕설까지. 저도 모르게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차츰차츰 얼굴과 마음에 깊은 골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청각장애인들, 저보다 먼저 수화를 배우고 있는 친구들, 그들은 저에게 주름잡힌 마음을 펴주고 얼굴의 굳은 살들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영혼의 치료사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엔 저는 또 다른 장애인일 따름입니다. <토이>의 '스케치북'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광고에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실제 청각장애인이 등장합니다. 또 얼마 전(2월 25일)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에서 청각장애인 학교인 선희학교 학생들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 가운데 유독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습니다. 이웃집 동생 같은 정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는 그 친숙한 얼굴의 주인공이 CF에 나온 '고운이'란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요즘 이 광고가 나오지 않는데도 제 기억 속에 이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오래 남아 있었나 봅니다. 다른 사람들도 고운이를 알아보았을까 하는 궁금함에 2580 게시판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고운이에 대한 글들이 많았습니다. 광고를 다운해서 다시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글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한 청각장애인 소녀의 티끌없는 맑은 모습에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갑갑해지고 각박해지는 요즘 세태가 사람들의 얼굴에서 행복과 기쁨의 표정을 앗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 거울 앞에서 사람들은 그런 자신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고운이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서 잠시 흐뭇해하며 자신들이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모릅니다. 저는 앞으로는 몰라도 지금 현재로서는 비장애인입니다. 하지만 맑음이나 고운이 앞에서는 저는 비장애인이 아닙니다. 표정 장애인이며, 의사소통 장애인입니다. 지난번 봉사활동 모임에서 맑음이는 수화교실에 다니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수화를 배우고 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꼭 수화로 인사하고 대화해보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수화를 통해서 잃었던 것을 다시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출발은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간단한 수화 한 토막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맑음아, 우리 다음에 만나면 수화로 인사하자." /오마이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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