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읍성 이야기
광주읍성 이야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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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 콜박스는 광주읍성의 서문밖 자리다.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20호(1994년 4월13일 지정)인 광주 읍성터는 지난 92년 4월 전라남도청 주차장을 만들기 위하여 부지정리를 하던 중 확인됐다. 읍성은 중앙로∼황금로∼구시청 사거리∼도청뒤∼노동청∼전남여고∼중앙초등학교 정문까지 석축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석축 둘레가 8천253척, 높이 9척이며 성안에 100개의 우물과 여첩(女堞)이 있으며, 못은 지금은 없어지고 성문으로 서원(瑞元 동), 광리(光利 서), 진남(鎭南 남), 공북(拱北 북)의 4문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읍성의 철거는 1909년 일본군이 한말 의병항쟁을 탄압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는 도로가 개설되어 일본인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는데 오늘날의 충장로 2,3가이다. 이 읍성은 조선시대 이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성벽과 관련된 돌들과 흙으로 된 둑만 일부 남아 있는데 확인된 성벽의 높이는 1.9m이다. 읍성시절 4대문을 열고 닫을 때는 태평소를 불며 취타(吹打)를 울렸다. 취고수(吹鼓手 : 나팔수와 북잽이)는 노란 제복을 입고 남색 띠를 둘렀으며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미투리를 신었다. 지금의 충장로 2가 조선대학교 동창회관 쪽에서 무등극장에 이르는 일대가 옛날의 광주객사터였는데, 객사안에는 목사의 집무장소로 쓰인 동헌과 부속건물이 있었다. 1912년 통계에 의하면 당시 광주는 2600여 호에 약 1만 4백 명의 인구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약 2천명이 일본인이었다. 1909년 6월 15일부터 광주∼영산포사이에 객마차(客馬車)가 운행되었다. 당시 보작촌으로 불리웠던 불로동, 황금동에 이르렀는데 이때부터 일본인 숙소와 음식점이 자리잡기 시작했으니 현재 황금동에 음식점과 요정이 많은 것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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