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반성한다'는 송교수에 대한 단상- 쟌다르크 그리고 송두율
[기고]'반성한다'는 송교수에 대한 단상- 쟌다르크 그리고 송두율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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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샤
송두율씨 기자회견을 TV로 틀어놓고 분주히 왔다갔다하다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반성한다”는 어구에 일순간 황망해졌다. 30년의 세월을 돌아 어렵게 귀국한 그이의 입에서 나온 조선 노동당 입당에 대한 자의식 부재에 대한 자기성찰, 혹은 반성이라는 고백 앞에서.

뤽 벡송의 영화 ‘잔다르크’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화형대 위에 묶여서 제발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구 하는 잔다르크. 그에게 주교는 한 장의 문서를 내밀며 서명만 하면 그 기회를 주겠노라고 ‘협상안’을 내민다.

물론 그 문서는 자신이 마녀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지만 고해성사에 대한 절박함으로 그 문서내용을 읽지 조차 못하는 잔다르크는 결국 서명과 함께-마녀임을 인정하면 화형은 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결국 화형을 당하게 된다.

그녀에게 절박했고 죽음을 앞둔 인간으로서 신에게 드리고자 했던 마지막 고해의 소망은 ‘그녀’라는 상징과 의미를 철저히 손상시키고 싶어하던 적대세력들의 모략으로 이용된다.

냉전수구세력들은 송두율의 고백을 ‘건국이후 최고의 간첩’ 운운하며 때를 만난 듯 광기에 미처 날뛴다. 하지만 30년을 타향에서 떠돌며 그가 몸으로 겪어냈을 분단과 냉전체제의 막막한 무게들을, 실정법상의 처벌을 감내하면서까지 영구 귀국하고자 했던 그이의 간절한 소망의 내력을, 반성이라는 단어 속에 함의된 그의 지난 행로에 대한 고뇌들을, 내가 그 얼마쯤이나 헤아려볼 수 있는 걸까?

영화라는 허구의 장면에서조차 가슴 저리던 그런 상황이 2003년의 우리 현실 앞에서 영화처럼 재현되고 있다. 그들은 ‘송두율’이란 상징과 의미들을 철저히 뭉개고 화형시키고 싶은 것이다.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지만 내자신의 원망이 있었습니다. 나로 인해 전쟁이 계속되고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잔다르크가 신 앞에선 인간으로서 자백하고자했던 반성들은 그녀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철저히 이익과 권력을 위해 그녀를 허물어뜨리고자 했던 반대세력들의 모략이나 그것을 방관했던 사람들의 침묵을 합리화시켜 주는 논리로 내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잔다르크에게 왜 그렇게 무지하게 서명을 했느냐고. 마녀라는 낙인과 맞바꿀 만큼 고해가 중요한 것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송두율의 고백 앞에 황망함을 느꼈던 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송두율에게 왜 그랬냐고, 왜 이렇게 돌아와서 수십 년만에 황망한 고백을 하는 거냐고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며 등을 돌려야 옳은 것일까. 냉전수구세력들의 화형놀이로 끝맺어질 뻔한 각본 앞에서.

아마 권력이란 지옥처럼 검고 커피처럼 달콤한 것이기에 권력을 쥔 자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유지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권력의 ㄱ 자에도 다가서 보지 못한 내가 어떻게 기득권의 불안과 위협 요소들 앞에서 널뛰듯 자지러지는 권력의 광기를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냉전논리를 언제까지나 끌어안고 놓칠 리 없는 그들 광기의 불길 속에서 남북 모두를 끌어안으려 했던 한 인사의 고난 했을 궤적들을 마녀라는, 빨갱이 라는 낙인을 붙여 화형시키도록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영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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