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씨 부모 ཆ년 눈물의 세월'
박승희씨 부모 ཆ년 눈물의 세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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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결정된 박승희씨 부모 '10년 눈물의 세월' '독재불감증'깨려 온몸 불사른 내딸 승희 하늘 무너지는 아픔이었지만 더많은 자식 얻어 아직도 의문사 유가족 많아 아쉬움 고향 목포서 민주화실천협 회장으로 바쁜 나날 지난 3일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이우정)는 지난 91년 군부독재정권 반대 등을 외치며 분신 자살한 전남대생 박승희씨(여·당시 교지 용봉편집위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했다. 그해 4월26일 분신한 박씨는 당시 '광주의 딸'로 불리며 도청앞 노제에서는 30만명 광주시민을 집결시킬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여대생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난 7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랜만에 망월동 3묘역을 찾은 박씨의 부모 박심배씨(55)와 이양순씨(55)를 만났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는 건 없네. 처음에야 갑작스럽고 힘들었지만, 주위에 자식들이 더 생겼다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지" 딸을 보내고 더 많은 자식을 얻었다는 아버지 박씨는 추모사업회 회원을 비롯한 전남대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건넨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안부전화 해주고 명절이면 반드시 찾아오는 또 다른 자식들이 있어, 오히려 '승희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도 해봤다고 한다. 특히 지난 3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결정에 승희 이름이 발표된 후 안부를 묻는 전화가 더욱 많아졌다.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려야 할 일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힘들지만, 아버님 어쨌든 축하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라는 메시지에서부터 "그 동안 고생 많으셨죠. 그래도 이제부터 조금 인정을 받고 빛이 보이네요"라며 그 동안의 어려움을 회상시켜주는 내용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아직 명예회복 심사에 포함되지도 못한 채 의문사로 남아있는 유가족이 많아 "이번에 됐다"고 말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고 한다. "이왕이면 다른 유가족들도 기뻐할 수 있게 많이 됐으면 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앞선 어머니 이씨는 정치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명예가 모두 회복되고 그 뜻이 공감대를 형성, 제대로 승화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딸이 남기고 간 뜻을 쫓아 살아온 이들 부부에게는 서운한 일도 많았다. 지난 5·18 신묘역 조성과정에서 '민주가족'이 받아야 했던 마음의 상처는 더욱 특별했다. 분신한 딸처럼 죽음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의 단절'을 자초하고 있는 상황 앞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그런 유가족들의 미묘한 대립보다는 '5월'과 '민주화운동'의 큰 역사적 흐름이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계승되길 바라는 마음 뿐…"이라는 박씨. 그래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민주열사 묘지 조성 후보지 선정문제도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모든 국민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수도권 지역에 조성하겠다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의견에도 수긍이 간다는 것. 하지만 이왕이면 광주가 좋지 않겠느냐는 속마음도 내비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화운동이 후세들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유구하게 승화될 수 있게끔 하는데 민주열사 묘역 조성이 좋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딸 승희가 갑작스레 떠나가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았지만, 승희가 박씨 부부에게 남기고 간 것도 많았다. 부모의 삶을 민주화와 통일의 길로 인도하고 떠난 탓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다는 것. 박씨는 현재 20년 넘게 살아온 목포지역에서 민주화를 위한 실천협의회(목민협) 회장을 맡고 있다. "빈민층에 대한 구조적 제도개선을 고민하고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려 하고 있지. 특히 통일을 위해서는 민간교류가 중요하기 때문에 목포-신의주간 자매결연도 추진하고 있네." 자식을 묻은 후, 하기로 결심한 일에 혼신을 다하며 살아왔기에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통일학교 교장도 맡고 자통위원장직도 담당해 왔다. 박씨는 딸이 산화해가며 당부하고 부탁했던 '불감증에 전염되어 버린 무감각한 인간'이 되지 말라는 유언의 편지를 가장 앞장서서 몸소 실천하며 10년을 살아온 것이다. 이젠 스스로 운동가가 되어 딸이 못다 이루고 간 민주와 통일의 길에 직접 나선 박씨.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자식을 10년 전 땅에 묻지 않은 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세월. 앞으로도 박씨 부부는 살아온 10년처럼 평생을 살아갈 생각이다. 딸이 앞서 남기고 간 뜻이 아직도 눈앞에 아련하고 귓가에 울리고 있기에…. "슬퍼하며 울고 있지만은 말아라, 너희는 가슴에 불을 품고 싸워야 하리" -박승희씨 유언 중에서- 박정민 기자는 전대신문 편집장과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 의장을 역임했고 전남대 독문학과에 재학중인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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