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신세계와 윤리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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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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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외국 명품 전문판매장으로 변한 광주신세계백화점 1층은, 무조건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의 뻔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탐욕(貪慾)이다. 나는 더 이상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한다. '아흔 아홉을 가진 자'가 백(百)을 채우기 위해 '하나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온다던가.

외국 명품 전문판매장으로 변한 광주신세계백화점 1층은, 무조건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의 뻔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진 건물이었다. 터미널을 만들겠다고 시민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했던 자리. 들어서서는 안 될 백화점이 들어섰다.

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1층을 시민공간으로 내놓았다. 그렇게 내놓은 땅이 아까웠을까. 언제부턴가 야금야금 상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점과 꽃가게 같은 것들이었다.

염치가 있다면 그쯤으로 족(足)한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신세계백화점의 탐욕은 여기서 그치질 않았다. 시민들을 위한 도시계획시설에 세계적인 명품판매점을 4개나 설치했다. 도시계획시설에 외국 명품 판매점이라니, 전국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기업이 무조건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을 반성해 나온 것이 '윤리경영(倫理經營)'이다. 기업도 사회구성원으로서,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번 옳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윤리경영' 도입에 앞장 선 회사가 바로 '신세계'다. 신세계는 협력회사들도 '윤리경영'에 참여 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신세계의 구학서 사장은 올해<시사저널>이 뽑은 한국 최고 10대 CEO로 선정됐다.

이 두 현상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으로 내세운 '윤리경영'과 뒤로 실천하는 '천민자본주의'. 1999년에 제정한 신세계의<윤리규정>은 '법규의 준수'와 '부패방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광주신세계는 법을 왜곡했고, 로비를 위해 돈 봉투까지 디밀었다. 과연 어느 것이 신세계의 참모습인가.

일이 이 지경이 된 데는 서구도시계획위원회의 책임이 크다. 그들은 지난 5월, 업종변경을 심의하는 비공개회의에 유독 신세계 관계자를 참석시켰다. 그리고 신세계의 의견대로 의류와 피혁제품 판매점 설치를 승인해, 명품관 입점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심의에서 서구도시계획위원회는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의도된-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명품점을 '매점'과 유사한 시설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명품점을 설치할 수 없는 법 규정 때문이었다. 소위 각계 전문가로 구성됐다는 도시계획위원회가 '매점'이라는 단어 뜻도 모르고 내린 결정이다.

매점 : (호텔 빌딩 역 등에서) 일상용품을 파는 소규모 가게
<두산동아 새국어사전>


그들의 눈에는 세계 최고급 제품이 일상용품으로, 50평이 넘는 매장이 소규모 가게로 보였을까.

만시지탄(晩時之歎). 하마터면 일상에 묻힐 뻔한 일이 한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최근 <참여자치21>이 '남용된 재량권을 바로 잡아 줄 것'을 광주시 행정심판위원회에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방송을 비롯한 언론도 이 사실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이제 하나에 수백만원씩 하는 고가품이 일상용품인지, 그리고 50평이 넘는 명품관이 소규모 가게인지의 여부는 광주시 행정심판위원회에서 가려지게 되었다. 잘잘못을 '법리(法理)'로 따지게 된 상황. 그에 앞서 신세계의 책임자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헌법'이라 부르는 <윤리규정 >의 한 구절을 들려 주고 싶다.

임직원이 회사 및 개인 행동의 결과가 법에 위배되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로 나타난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경우에는 즉시 경영진 및 기업윤리실천국에 알려야 하며 경영진은 지체없이 내용을 검토하여 사실확인 조사를 실시한다. (신세계 윤리규정, 제 4 장 임직원의 기본윤리 中에서)

지금이라도 신세계의 경영진이 '지체없이' '윤리적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믿음으로 살고자하는 이의 순진한 생각이련가.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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