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광주는 여전히 민주의 도시인가
[오늘과내일] 광주는 여전히 민주의 도시인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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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1997년 제 15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 전라도의 한 아낙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는 경상도 사람이 해도 좋고, 전라도 사람이 또 해도 좋고…"
그랬다. 그 때 전라도는 한 맺힌 수 십 년 세월을 풀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얼마나 염원했던 '소망'이었던가. 그동안 살아온 소외와 설움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국민의 정부 5년. 전라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권력쥐자 지난 잘못까지 무분별해진 전라도

무엇보다 '권력'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그동안 권력은 비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우리 편'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가 차지한 권력 또한 긍정적으로 다가 온 듯 하다. 문제는 '권력'을 받아들이면서 지나간 역사의 잘못에 대해서까지 무분별해져 버렸다는 우려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소위 광주의 시정원로자문위원의 명단을 받아들었을 때 이었다. 원로라고 하면 한 인간이 평생을 아주 잘 살고 난 뒤 얻을 수 있는 명예로운 칭호이다. 그런데 광주시가 원로로 규정한 사람들의 면면은 이런 인식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광주가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 권력을 누리고, 금력을 키워 온 자들. '광주의 원로' 속에 그런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원로'의 명예를 주고도 광주는 여전히 민주의 도시인가?

이제 와서 지난날의 잘못들을 찾아 단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를 평가하는 것까지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역사가 바로 서지 못한다. 백 번 양보해도, 전직 공안검사 출신이 민주의 종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현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살아 온 시대의 어려움'을 변명으로 받아들인다 하드라도,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상징물을, 민주화 운동가를 구속했던 사람의 손에 맡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상황을 그냥 두고 보는 민주화 운동권의 태도도 문제다. 운동권의 이런 애매한 태도 때문에, 독재와 싸워 온 민주화투쟁이 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운동권은 어디에 있는가? 광주의 시민운동권은 지금 제도권이 만든 각종 위원회의 말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참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운동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시정의 건전성을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문화수도 육성추진위원회나, 광주국제영화제집행위원회 같이, 시민운동은 반대하고 시민단체대표는 참여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날짜가 잡히면 오고 갈 뿐, 그 안에서 잘못을 시정하려는 어떤 노력도 보지 못했다.

도대체 광주시의 아름다운 경치와 맛있는 음식을 뽑는다는 8경 5미 선정 위원회에 시민단체 대표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라도 제도권에 한 다리를 걸치고 싶은 욕심인가? '운동'이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다면 차라리 생업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시민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론에 나갈 직함을 위해서 시민운동가 행세를 하고, 언론운동가가 자기가 공격하던 회사의 사외이사가 되고, 시민단체 책임자가 정당의 창당에 참여하면서도 시민단체직을 유지하는, 참 이상한 풍토가 되었다.

DJ정권 5년 한풀이 대가로 '염치'지불했나

최근 광주시금고나 경륜장 관련 건들에서 시민단체들의 주장이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시민단체의 도덕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신세계백화점의 편법을 눈감아 준 사람들이 송원학원의 특혜를 외친다고 해서, 지난 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시금고 조례를 올해 강력히 주장한다고 해서, 그 말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 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최근 말썽이 된 광주국제영화제는 지난 시대의 과오를 망각한 기득권집단과 이제 새롭게 권력잡이에 나선 소위 운동권 세력의 결탁과 갈등이, 세상 일을 얼마만큼 그르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수십 년 민주의 도시로 살아 온 광주. 김대중정권 5년 동안 골골이 맺힌 한을 풀어내긴 했지만, 살면서 가져야 할 '염치'며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그 대가로 지불해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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