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당신들의 축제
[오늘과내일]당신들의 축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8.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김양균 변호사.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검사로 일했고, 80년대 말부터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이런 법률가가 한 단체의 정관을 만들었다면 대단히 모범적이리라는 기대가 가능하다. 그 뿐 인가. 대학 총장과 법대교수, 고위 공무원.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다섯 명이나 모여 정관개정을 심의했다. 그렇게 만든 것이 광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개정 정관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개정 정관은 기본적인 법리(法理)조차 지키지 않았다.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만든 '모순투성이'

여러 모순 중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정관 개정에 따라 총회 역할을 하게 된 조직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이다. 새 정관 13조 1항은 조직위원을 조직위원회에서 선출한다고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뽑는 모순을 규정한 것이다. 국회의원을 국회에서 뽑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시장(市長)이요'하고 나서는 이가 시장이 되는 꼴이다. 8월 11일 열린 조직위원회(총회)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참석자들이 스스로를 조직위원으로 선출한 것이다. 오다가다 뭉친 갑남을녀(甲男乙女)가 아니다. 광주시장을 비롯해서 전직 국회의원, 대학 총장, 변호사, 교수, 각급 단체장. 스스로 광주를 움직인다고 자부할만한 사람들이 모여, 한껏 점잔빼며 저지른 일이다. 조직위원이 조직위원을 뽑는 모순도 문제지만, 아직 뽑히기도 전, 그저 자연인일 뿐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든 누구든 간에 누군가를 선출하는 권한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하다.

개정 정관은 또 조직위원회에 430여명의 임원을 둘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러면서도 총회는 65명으로 구성한다. 나머지 3백 60여명은 임원이면서도 어떤 의사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거기다 또 일반회원도 있다. 이들은 그저 있을 뿐이다. 총회를 조직위원회로 대체함으로써 1년에 한 번 모여 투표하는 역할까지 빼앗아 갔다. 대명천지 민주사회에 이렇게 비민주적인 조직이 또 있을까.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최악의 정관을 만들었다. 왜 일까. 아마도 딴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으로 영화제를 잘 만들겠다는 건전한 상식을 가졌다면 이렇게 터무니없는 규정을 만들 수는 없다. 새 정관에 명문화(明文化)된 공동위원장이라는 직제(職制)는 그 배경의 일단을 짐작케 한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대표를 맡는 것은 여러 단체들이 모여 협의체를 구성할 때 흔히 쓰는 방식이다. 그러나 광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집행기구의 성격이 강한 개인들의 조직이다. 이런 조직에 공동위원장이란 직제(職制)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직제를 왜 만들었을까? 1회 때는 없었던 공동위원장제가 2회 때부터 생기면서, 전직위원장들이 공동위원장으로 앉아 있다. 그래서 공동위원장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뒤 국정에 계속 간여하기 위해 만들려 했던,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물러날 때는 물러 날 줄도 알아야 한다.

회원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분과협의회장을 34명이나 만든 것은 또 무엇인가? 광주영화제를 허명(虛名)의 배분처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 밖에도 지면이 부족해 다 쓰지 못하는 모순이 하나 둘이 아니다.

소수에 의한 농단…정작 주인은 소외

불행일까 다행일까. 조직위측은 정관이 개정됐다지만, 아직 정관 개정의 합당한 절차도 밟지 못했다. 정관을 개정하려면 기존 정관에 따라 회원 전체가 참여하는 총회를 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조직은 창립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총회를 열어 본 적이 없다. 몇몇 사람들이 위원회를 농단(壟斷)해 왔다.

그런 사이 정작 영화제의 주인이어야 할 영화인들은 소외됐다. 올해 조직위원 65명 가운데 영화인은 단 3명 뿐이다. 나머지 자리는 모두 '과연 1년에 영화관을 몇 번이나 갈까' 싶은 인사들이 차지 했다. 거기다 실무자 그룹과 명망가 그룹이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러고도 영화제가 잘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중앙정부와 광주시는 이런 단체에 10억원을 지원해 영화제를 치르게 했다.

책임질 때는 책임 질 줄 알아야 하고, 떠나야 할 때는 떠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뒷모습이 구차하지 않다. 떠날 사람 떠나고 '영화에 미친' 사람들이 남아 '우리 모두의 축제'로 만드는 그런 영화제를 보고 싶다.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