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5월은 다시 돌아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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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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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균 기자
5월은 다시 돌아왔는데..
'80년 왜곡' 조선일보 김대중주필 왜 '화끈한 사과' 안하나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현장파견
"총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무정부 상태의 광주" 기사화
또다시 월간조선 85년 7월호  '금남로의 10일'서  "항쟁당시 사망자 2백명" 축소보도
 '반성.사과'가 아니라 '5.18리포트'서 뒤늦은 후회
김주필의 '참된 사과'가 실린 5.18일자 컬럼난 기대해보자


   
▲ 80년 5월 광주/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은 김대중 주필이었다.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는 직선'이라는 수학원리는 김 주필의 글에 대한 적확한 표현이다. 그는 쓰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쾌속으로 나아간다. 이 직선의 미학이야말로 김 주필을 당대 제일의 논객으로 만드는 개성이다...무엇보다 이들은 용기있는 칼럼니스트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조선일보 97.3.5)

조선일보 '당대논객' 추켜세워 조선일보는 지난 97년 3월 5일 창간 77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의 명칼럼니스트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당시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김대중 주필을 비롯해 류근일 논설주간, 이규태 논설고문, 홍사중 논설고문, 최청림 논설실장 등 5명을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추켜세우고 있다.

아울러 이들 5명의 논객들은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아래서 용기있는 칼럼을 집필해 온 '스타'로 올려졌다. "권위주의가 언론을 누르던 80년대, 신문칼럼은 곧 용기였다. 이들 5인은 이런 칼럼의 시대가 만든 스타들이다."(조선일보 97.3.5) 특히 김대중 주필은 거침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직필의 달인'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그 직필의 달인은 80년 광주를 직필로 쓰지 않았다.

김 주필의 상황논리 지난 97년 5월, 한국기자협회와 무등일보 등은 17년간 감춰져온 광주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80년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내외신 기자들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5.18 특파원 리포트'를 펴냈다. 모두 8명의 외신 기자들과 9명의 내신 기자들이 기고한 이 책의 필자에는 조선일보의 김 주필도 포함되어 있다.

김 주필은 이 책에 기고한 글의 제목을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로 잡았다. 김 주필에 따르면 광주와 자신의 악연은 모두 3번 맺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광주와 늘상 악연으로 만나곤 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사회부장으로, '금남로의 10일'(월간조선 85년 7월 기사....편집자 주) 때 출판국장으로, 그리고 광주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평사태(조선일보와 평민당의 싸움) 때 논설주간으로 광주와 불편한 관계로 만났다."(<5.18 특파원 리포트>, 294쪽)

"총든 난동자들 서성거려" 김주필과 광주의 첫 번째 악연은 80년 광주 현장이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따르면 김 주필은 당시 사회부장으로 광주에 파견되어 현장의 참혹함을 생생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온 김대중 당시 사회부장은 광주를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무정부 상태의 광주"(조선일보 80.5.25)로 묘사했다.

조선일보는 또 "광주일원 소요사태"(1980.5.22), "폐허같은 광주...데모 6일째...자극적인 소문이 기폭제"(1980.5.23), "목포선 복면쓰고 시위"(1980.5.23), "유혈의 거리 청소...질서찾는 광주"(1980.5.24), "광주사태 10일째 광주·목포 제외 평온 회복 무정부상태 광주1주"(1980.5.25) 와 같은 기사를 연속적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5.18특파원 리포트'에서 김주필은 '반성'과 '사과'를 하기보다 '초라한 자위'를 하며 '후회'할 뿐이다. "나는 지금 그럴 바에야 그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다. 결국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5.18 특파원 리포트> 289쪽)

김 주필은 80년 광주에 대한 왜곡을 '사과'가 아닌 '어쩔 수 없었던 일'로 후회하고 넘어가려 한다. 이에 대해 <미디어오늘> 편집장 김종배 씨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왜곡은 광장에서,사과는 뒷골목에서 "김 주필의 고백을 관통하는 것은 상황논리다. 여기에 상대평가의 잣대가 덧붙여진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모아진다. '보도검열이 횡행하는 계엄하에서는 그래도 그 기사가 최선이었다.

결국 김 주필의 고백은 주장이 되었고, 사과는 상황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것이 되었다."(<미디어오늘> 1997.5.26) 김주필의 이런 방식의 고백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기도 하다. 조선일보의 '용기있는 논객'으로서 광주항쟁 왜곡에 대한 '후회', 아니 사과를 하려면 왜곡했던 공간인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김주필은 조선일보의 정기 칼럼란을 제쳐두고, 여러 기자들의 글이 섞인 '단행본'을 통해 후일담 삼아 '후회'할 뿐이었다. 왜곡은 광장에서 하고 후회는 뒷골목에서 하는 꼴이다. 그는 왜 "용기있는 직필"답게 화끈한 사과를 하지 않을까? 김주필과 광주의 두 번째 악연은 김 주필이 조선일보 출판국장으로 일하던 시절인 85년 7월 '광주'를 월간조선 기사로 쓰면서 만들어졌다.

이 기사를 쓰면서 김 주필은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 그런 기사를 써보겠다고 감히(?) 나섰던 데는 이유가 있다"며 "나는 당시 정부 요로에 접근해서 이렇게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제 5년이 지나 '광주'로 인한 정권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 가고 있는데 아직도 문제는 광주 희생자가 2천명이 넘는 것으로 다들 알고 있다는 데 있다. '2천명의 희생 위에 선 정권'은 이 정권의 영원한 불명예다.

그래서 우리가 취재해 보니 실상 희생자로 파악되는 것은 2백∼3백명으로 나오니 이것을 토대로 써주는 대신 광주사태가 일어나게 된, 즉 그것을 촉발시킨 17, 18일의 상황을 같이 써주는 것이 어떻겠느냐?"(<5.18 특파원 리포트> 290쪽) 김주필의 설득 덕분에 월간조선 85년 7월호는 '금남로의 10일'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광주 항쟁 당시 사망한 사람을 "2백명을 조금 넘는 숫자"로 축소해 보도했다. '취재기자좌담'의 형식을 빌어 "확인해 본 결과 많아도 2백명을 조금 넘을 것"(월간조선 1985년 7월호 490쪽)이라는 결론을 유도해 낸 것이다. 그러나 현재 광주시 집계로 사망자는 전체 247명, 실종자 64명, 부상자 2446명으로 되어 있다.

당시 이 좌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청원 전 국회의원, 이영배 월간조선 사진부 차장대우, 오효진 월간조선부 차장대우, 조갑제 월간조선부 차장대우, 조남준 월간조선부 기자 등이다. 자기 미화된 '정권의 탄압' 조선일보의 '조선일보 80년사 인물자료DB'는 또 김주필을 5공 시절 정권의 탄압을 받은 의로운 직필처럼 묘사하고 있다.

"(김주필은) 출판국장 때는 당시 '금기 사항'이었던 '광주사태'를 월간조선의 특집으로 다뤘고 출판국장 재직때 쓴 '일요칼럼'이 대통령 전두환의 반감을 사, 1986년 뜻하지 않은 '영국 옥스퍼드대 연수'를 1년동안 다녀왔다." '명칼럼니스트들' 기사에 따르면 김주필이 전두환 대통령의 반감을 산 대표적인 일요칼럼은 84년 11월에 쓴 '거리의 편집자들'이라는 글이다. "

김 주필은 84년 11월 광화문 지하도에서 신문의 톱기사는 무시한 채 1단짜리에 빨간 줄을 쳐서 파는 사람들을 소재로 '거리의 편집자들'이란 유명한 칼럼을 썼다. 그는 "'우리는 오늘도 거리의 편집자들에게 졌다. 저 친구들 잘도 뽑아낸다'면서 히죽이 웃을 수 밖에 없는 마음속에 쓰디쓴 느낌이 가라앉는다"고 언론 상황을 자조했다.

그는 연속적인 비판적 칼럼으로 정권의 미움을 사 86년 10월 본의 아닌 영국행을 해야했다."(조선일보 97.3.5) 그러나 정권의 미움을 사 탄압받은 것이 겨우 '영국행 유학'이었다면 그것을 '탄압의 증거'라고 자랑할 수 있을까? 정권 미움 사 영국유학?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당대 제일의 논객'이 정권의 미움을 사 당했다는 벌이 겨우 '영국행'이라는 것 아닌가. 그동안 수많은 언론인들이 언론은 직필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 아침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에서 거리로 내쫓겨 일부는 홧병으로 죽고, 일부는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일부는 월부책 장사를 하고, 일부는 출판사를 차렸다가 본전까지 까먹으며 생존 그 자체를 허덕였는데도 '당대 제일의 논객'은 겨우 영국으로 쫓겨났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그가 누구처럼 런던에서 택시운전사를 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곧 돌아와 승승장구하며 출세가도를 치달았지 않았던가?"(<인물과 사상> 4권 28쪽).

이어 강준만 교수는 김주필의 이력에 대한 평을 이렇게 요약한다. "김주필이 '직필의 달인'이라는 건 우리 언론 현실을 전제로 할 경우엔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언론다운 언론을 상정하여 말하자면 그는 '처세의 달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인물과 사상> 4권 56쪽)

다시 5월이 돌아오고 있다. 이미 20년 저만큼의 세월을 두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내놓지 않은 김주필의 이번 5월은 다르기를 바란다. 수사학적 말장난이 아닌 '참된 사과'가, 다른 단행본이나 잡지가 아닌 5월 18일자 조선일보 지면에 오르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균 기자 ernesto-gevara@hanmail.net (오마이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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