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원로와 전문가
[오늘과내일]원로와 전문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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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1996년, 경실련 통일협회를 따라 백두산에 오른 적이 있다. 심양과 연변을 거쳐 백두산에 가는 동안, 윤동주님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도 둘러보았다. 그 일행을 이끄신 분이 지금 상지대 총장이신 고려대 사학과 강만길 교수셨다.

강교수님은 단아한 체격에 등산복 차림으로, 자그마한 배낭을 메고 계셨다. 의관(衣冠)이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고, 몸가짐에 기품이 있으셨다. 그런가하면 한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막힘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사람들이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해 강교수님 근처로 모여들곤 했다. 일행 중에 유수한 대학의 교수들도 여럿 있었는데 다들 강교수님을 존중했다.

이미 한국사에 일가(一家)를 이룬 선생이지만, 매년 발표되는 박사학위 논문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금새 뒤쳐진다고 하셨다. 나는 그 분에게서 진정한 원로의 모습을 보았다. 안개가 덮히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가도 한순간 바람에 그 신령스런 모습을 드러내곤 하던 백두산 천지에서,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오래토록 집 거실에 걸어두었다.

광주시가 지난해 말 시정원로자문회의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구성이 의아하다. 부당하게 노동자들을 해고한 사주, 온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선출된 된 경제단체장, 시민단체가 반대한 전직 시장. 원로라는 말이 지니는 '존경'의 의미를 찾기 힘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원로라기보다는 그저 '세속에서 출세한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그들 속에 몇 분 종교인들이 구색맞추기로 끼워져 있는 느낌이다. 광주시는 이 원로회의의 해외여행경비 2천만 원을 예산에 책정했다가, 의회 심의에서 삭감됐다. 2천만 원을 보통사람 20만원 쓰듯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꼭 시민의 혈세를 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5일, 광주전남발전연구원의 연구실장이란 분이 '문화관광부 등 중앙부처 8개를 여러 지방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실이라면 참 한심한 일이다. 정부부처는 지속적인 협력을 위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타당하다. 지방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은 산하기관에 한한다. 그런데도 연구실장은 국가 행정의 중심인 정부부처를 단순히 지역 발전의 수단으로만 이해하는 과오(過誤)를 범하고 있다.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것이다. 지역발전을 위한 충정(忠情)이라지만, 전남발전연구원의 연구실장이 거리의 장삼이사(張三李四)와 같을 수는 없다. 행정학자에게 한번만 물었더라면 세계적으로 전례(前例)없는 일임을 금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국제정치를 전공한 젊은 교수를 찾아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다. 그는 '젊은 교수가 나서면 선배들이 싫어한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언론에 자주 나오는 선배 교수를 추천했다. 그는 전공이 전혀 달랐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그 선배교수가 '인터뷰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선배교수가 자기 전공이 아니라고 거절하면, 자연스레 다시 젊은 교수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자기 전공이 아니면 아는 체 하지 않는 것이 학문세계의 금도(襟度)일텐데, 문제는 남의 영역을 기웃거리는 사이, 자기 전공마저 부실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광주시가 부실공사 처벌에 대한 법 해석을 의뢰했을 때, 변호사 3명이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광주시는 변호사 3명 가운데 2명이 내놓은 의견을 택해 결론을 내렸다. 법률해석을 무슨 인기투표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상황이 이쯤이면 변호사들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밝히고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결말을 내야 했다. 전문가라면 그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심지어 아무 설명없이 그냥 결론만 내놓은 변호사도 있었다. 잠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여러 번 법률자문을 받았지만, 자기 판단의 법리적 근거를 밝히지 않은 법률자문서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자기 판단의 근거를 밝히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지식사회라고 한다. 우리가 첨단산업에 대한 정부 투자를 원망하고 있을 때, 세계적인 첨단 도시들은 지식사회에 적합한 '도시모델'을 고민했다.
세속에서 출세한 것에 불과한 '원로'들과 마지막까지 전문성을 견지해야 할 전문가들이, 그저 자기 상식에 근거한 무책임한 얘기를 늘어놓는 한, 광주는 지식사회 속으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다.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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